서울 강남구에서 근무하는 회사원 이모(48)씨는 요즘 회사 근처 지하철역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최근 몇 달 동안 같은 장소에서 경찰의 느닷없는 불심검문을 세 차례나 받은 탓이다. 그는 양복 정장을 입고 대로변을 걸어가는 자신을 붙잡은 이유를 경찰관에게 물었지만 별다른 이유를 듣지 못한 채 신분증을 제시해야만 했다.
이씨는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같은 장소에서 연거푸 똑같은 일을 당하다 보니 이제 짜증을 넘어 이곳을 지나기가 겁난다"며 "회사 근처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을 수도 없고, 어찌 피할 도리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특별한 사유도 없이 다짜고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묻지마식 불심검문'이 늘고 있어 시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특히 경찰이 불심검문시 이용하는 수배자 확인용 휴대폰 조회기의 사용 건수가 실적과 연결돼 무차별적 검문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경찰은 6월부터 기소중지자 특별단속에 들어가 서울 강남과 영등포 일대 등에서 대대적인 불심검문을 벌이고 있다. 지하철역 주변 등에서 정기적으로 1~2시간씩 목 검문을 하거나, 주요 거리에 아예 50~60명을 투입해 8~12시간씩 집중적인 검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불심검문의 상당수가 현행 규정과 절차를 어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찰관직무집행법에 따르면 경찰은 수상한 거동 등으로 범죄 연관자라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에 한해 불심검문을 요구할 수 있다.
검문시에 경찰관은 소속과 성명, 검문 이유를 밝혀야 하지만, 경찰관 상당수가 이런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말이다. 이모(33)씨는 "경찰이 신분을 밝히지 않길래 불심검문에 응할 수 없다고 했더니 강제로 넘어뜨리고 지갑을 빼앗아 신분증을 꺼냈다"며 분개했다.
이로 인해 시민과 경찰이 불심검문 과정에서 시비가 붙는 경우도 잦아지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마포구의 한 빌라 주차장에서 일어난 경찰의 시민 폭행 시비도 불심검문이 발단이었다. 홍익지구대 양모 경사는 "절차를 지켜 검문하는데 상대방이 먼저 욕을 하며 폭력을 휘둘렀다"고 주장했지만, 사회복지사 허모(28)씨는 인터넷을 통해 "경찰이 반말을 하며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했다"고 반박했다.
인권위에 접수된 불심검문 관련 진정도 2006년 7건에서 2007년 27건, 2008년 36건으로 매년 늘고 있고, 올해 들어서도 24건이 접수됐다. 인권위 관계자는 "경찰관이 정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신분을 밝히지 않거나 검문 목적을 고지하지 않는 등 절차 위반에 관한 것이 많고, 검문 불응을 이유로 물리력을 행사했다는 내용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은 불심검문이 기소중지자 검거에 효과적이라는 입장이다. 경찰 관계자는 "기소중지자 대부분이 경제사범들인데, 이들은 멀쩡한 양복을 입고 다니며 도피하고 있어, 이들을 잡아내기 위해 시민들의 불편이 다소 있더라도 불심검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경찰에서는 불심검문을 많이 하는 경찰관 일수록 '열심히 일하는' 경찰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경찰청 공개자료에 따르면 불심검문 등에 이용되는 휴대용 조회기 사용 건수가 2005년 3월 626만여건에서 올해 5월 7,797만여건까지 치솟았다.
한 경찰관은 "조회 실적이 낮으면 일을 안 하는 걸로 여기고 간부들이 엄청 닦달한다"며 "경찰청에서도 조회실적이 낮으면 조회기를 회수해 다른 경찰서에 배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검문을 할 때도 많다"고 말했다.
경찰은 아예 여당 의원입법을 통해 불심검문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 개정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이인기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엔 불심검문 목적에 '공공시설 위해 방지'를 추가하고 수색 범위를 '흉기 소지 여부'에서 '위험한 물건'으로 확대하는 내용이 담겼고, 이성원 의원 대표 발의안엔 제복을 입은 경찰관에겐 신분증 제시 의무를 면해주는 내용이 담겼다. 두 법안은 모두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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