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스승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권오익 학장이고 다른 한 분은 박희범 교수이다. 권오익 교수는 1905년 마산 출생으로 강직한 유학 선비이며 특히 제자들을 아끼는 분이었다,
동경상대를 나와 서울상대 학장과 성균관대 총장을 역임했다. 내가 3학년 때 전국 대학생 경제정책 토론대회에 발표자로 나간 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학장이었던 선생님은 나를 매우 아껴주셨으며 졸업 후에도 자주 뵈었다. 1989년 건설부 장관직에서 물러나던 날 집에 와보니 선생님은 라디오를 듣고 걱정이 돼 집에 와 기다리고 계셨다.
선생님은 숙명여고 교장이었던 부인 문남식 여사와 여러 차례 갈현동의 우리 집에 오셨다. 우리 집 담 너머에 수국사라는 절이었는데, 한 번은 오셔서 옛날 6ㆍ25전쟁 때 그 절에 피신해 있었노라 하시며 깜짝 놀라셨던 일이 있다.
또 한 분 박희범(1922-1981) 교수는 내가 경제발전에 관해 공부하는데 있어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다. 경북 김천 출생의 진보성향 경제학자로 내용이 충실하고 열정적인 강의가 인기를 끌었다.
나는 성북구에 있었던 선생님 댁에 자주 가서 찾아 뵙고 얘기를 나누었으며, 특히 나의 진로문제에 대해서도 의논을 드렸다. 그 뒤 문교부 차관과 충남대 총장을 역임하셨는데 총장을 그만 두고 사시던 영등포구의 집에 찾아가 인사를 드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졸업하던 해인 1961년의 취업은 매우 어려웠다. 공채는 몇 개의 은행, 해운공사 석탄공사 대한중석 등 몇 개의 공기업, 3~4개 신문사 정도였고 민간 기업은 천우사 동명목재 삼성물산 등 몇 개 기업에서 각각 열 명 내외의 인원을 뽑았다.
그래도 은행은 행 당 10~20명씩 뽑았고 안정된 직장이라 해서 인기가 높았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은행이 으뜸이었다. 그래서 당시 서울상대에서도 취업률은 20~30%가 될까 말까 하였으니, 그 때 대학졸업은 대부분이 실업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나의 학업과 취업준비에 대한 계획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선 나의 성적은 3학년 2학기부터 매우 양호하여 어떤 취업시험에도 학교 추천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경제학에 대한 탐구도 내 나름대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4학년 때인 1960년 11월20일에는 '경제개발과 경제체제'라는 주제로 서울상대 주최 토론회가 있었다. 전문가로는 김영선 재무장관, 국회에서 송방용 의원과 이충환 의원, 대학에서 고승제ㆍ박희범ㆍ이동화ㆍ성창환 교수, 언론계에서 이동욱 동아일보 논설위원, 그리고 학생 측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 10여개 대학 대표들이 모여 발표와 토론을 하는 것인데, 나는 이 토론회를 주관 하였고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그리고 이 때 동아일보에는 매주 한 번 대학생 논단이 있었는데 나는 세 번에 걸쳐 환율 현실화 문제, 후진국 경제개발 문제, 농촌개발정책 등에 대해 기고 한 바 있다.
4학년이었던 1960년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우리 모두는 취업문제에 들떠 있었다. 나는 한국은행 조사부를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은행에 합병되어 없어진 한일은행의 시험이 먼저 공고 되었다.
한국은행에 합격된다는 보장이 없는 나는 우선 한일은행에 응시하여 최소한의 보장을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한국은행에 응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산이었다.
그 때 각 기관의 공개채용은 대학별로 응시할 수 있는 인원을 정해 각 대학에 응시원서를 보냈기 때문에 대학 추천 없이 마음대로 응시할 수 없었으며, 대학은 성적순으로 추천했다. 그리고 한 번 추천 받은 사람이 시험에 떨어지면 계속 추천 받을 수 있지만 일단 합격이 되면 맨 후순위로 물러나기 때문에 다시 학교추천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학교 추천을 받아 한일은행에 응시하였는데 11월30일 발표에서 합격이 되었다. 그 후 한국은행이 12월11일 입행시험을 본다는 공고가 나왔는데, 한일은행에서 그날 면접이 있고 면접에 불참하면 합격이 취소된다는 통보가 왔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학교추천을 이 이상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은행에 응시 할 수도 없다는 점 이었다. 나는 한국은행 시험을 볼 수만 있다면 한일은행을 포기하기로 했다.
궁리 끝에 나는 고향출신 국회의원이었던 송방용 의원을 찾아가 한은 입행시험을 볼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사정했다. 그 분은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대리위원을 지낸 일이 있어 그럴 힘이 있다고 생각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분은 바로 이치녕 당시 한은 감사에게 전화를 하더니 나에게 서류를 들고 그 분을 찾아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을 찾아가 입행시험 원서를 접수 시켰다.
드디어 한은 입행시험을 보았다. 모험이었다. 떨어지면 게도 구럭도 다 놓지는 것이다. 나의 예상점수는 자신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그런 것이었고 한일은행에서는 실격통지가 온 터라 불안하기 말할 수 없었다. 12월19일 합격자 발표 일에 나가보니 25명의 명단에 내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기쁨은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날 내 일기장에는 '쾌재!'라는 글자를 연이어 세 번이나 되풀이 해 써 놓았다. 25명의 합격자는 경상계 16명 법학계 9명이었는데 나는 경상계의 수석이었다. 이때의 동기 입행자에는 강경식 경제부총리 유시열 한은 부총재 이경재 중소기업은행장 주범국 경기은행장 이종순 변호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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