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년 전 국제 질서의 재편 과정이 집약된 사건으로서 임진왜란(1592~1598)의 의미를 짚는 학술대회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세계의 변동'이 한일문화교류기금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19일 전남 여수시 오션리조트에서 열렸다.
한·일 역사가들은 전쟁의 물길을 돌린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둔진(屯陣)했던 도시에 모여, 동아시아 각국이 근대의 토대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겪었던 충돌과 상호 영향을 거시적 관점으로 분석했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는 임진왜란을 명(明) 중심의 중화질서가 패퇴하고 일본과 여진(후금)이 새로운 패자로 부상하게 되는 결정적 분기점으로 파악했다.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체제 속에서 조선은 가장 충순한 번국(藩國)으로 자임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은 그 질서를 근본부터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결과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 명은 누르하치(청ㆍ淸의 창업자)의 굴기를 막지 못했다. 조선 또한 명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의 굴레가 두 차례 호란으로 돌아오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 반면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여줌으로써 화이변태(華夷變態·변방 민족이 중국 대륙을 장악함)의 시대 새로운 패자로 떠올랐다.
한 교수는 임진왜란 후 급격히 변화한 세계 질서의 표현형들에 초점을 맞췄다. 조선은 전후 9년 만에 사절단(통신사) 파견을 시작하는데, 한 교수는 이를 대륙 정세의 변동과 연관지어 설명했다.
"조선은 피랍인 귀국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여진의 세력이 커지면서 관심을 서북방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는 분석이다.
한 교수는 조·명, 조·청, 명·일 사이의 역학관계도 임진왜란을 분기점으로 급격히 재편됐다고 분석했다. 예컨대 명과 일본의 강화 과정에서 명은 일본에게 조공질서 속으로의 편입, 일본은 명에게 국교 정상화를 통한 무역 관계를 요구하는데, 이는 달라진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호리 신 일본 교리츠여대 교수는 '삼국국제(三國國制)'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구상을 통해 당시 일본의 패권 의식을 설명했다. 그는 히데요시가 대륙 정벌을 완료한 후 한·중·일을 분할통치할 안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통치안은 '공무(公武)결합 왕권구조'로 요약되는데 "히데요시는 천황(국왕)과 관백(실질적 통치자)이 세트가 된 지배체제를 3국에 각각 두려고 했다"는 것이다.
호리 교수는 히데요시가 실지로 각국에 배치할 천황과 관백의 후보까지 내정해뒀다는 사실을 밝히며, 이런 구도 속에 히데요시가 추구했던 궁극 목표를 '중화 황제'로 추정했다.
당시 동아시아 각국은 중국과 대등하게 자기를 평가하면서 한정된 지역 속에서 스스로를 '중화'라고 내세우는 경향이 있었는데, 히데요시는 '중국과의 대등'을 넘어 '중국 정복'을 계획했다는 차이점이 그 근거다.
'중화'의 근거는 본래 '예(禮)'에 있다는 것이 동아시아의 화이사상인데, 히데요시의 세계 구상은 예 대신 '무(武)'를 근본으로 삼았다는 것이 호리 교수의 분석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은 그런 패권 의식이 실현되고, 또 좌절되는 전개 과정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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