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뚝만한 숭어떼 "점프 실력 봤지"
물 반 고기 반이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조용한 호수였는데 모터보트를 타고 호수로 들어서자 물고기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화호 상류에서 서해를 향해 방조제 쪽으로 물살을 가르자 배가 지나가는 곳마다 팔뚝만한 숭어들이 물 위로 솟아올랐다. 수십 마리가 떼지어 솟구치는 바람에 옷이 흠뻑 젖었다. 호수 가운데 조성된 갈대 숲 옆에는 백로와 왜가리, 가마우지가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다.
곳곳에 숭어떼 몰려다녀
갈대 숲에 접근하자 동행한 안산시청 지구환경과 공무원 최종인(55)씨가 물고기가 튀어 오를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그의 말대로 갈대 숲 근방에서는 40~50㎝ 크기의 숭어가 잇따라 뛰어올랐다. 한두 놈이 아니었다. 어떤 놈은 1m 정도를 뛰어오르더니 3~4m는 거뜬히 비행하다 잠수했다.
배가 움직이면서 자주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숭어와 잉어가 배에 부딪쳐 나는 소리다. 배 주위를 관찰해보니 물고기 동선을 따라 호수 곳곳에 잔잔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시화호 상류에는 물고기가 이동하는 어도가 자리잡고 있다. 물길을 막은 보 위에 고기들이 이동할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만든 길이다. 어도 바로 아래는 대충 봐도 숭어와 잉어 수백 마리가 뒤엉켜 몸을 비틀고 있다. 백로 2마리가 어도에 진을 치고 있다. 경험적으로 이 곳에 먹이가 많은지 아는 놈들 같았다.
몸집이 큰 중대백로는 느긋이 서있다 제법 큰 물고기를 잡아먹고, 쇠백로는 고개를 숙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고기를 찾아 다녔다. 어느 새 보 위에는 괭이갈매기 3마리와 왜가리도 등장했다. 보 뒤편 철조망 위에도 백로 수십 마리가 앉아 동료들의 먹이사냥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공룡유적지가 야생동물 보금자리로
안산시 갈대습지공원 내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멀리서 볼 때 잎이 무성해 보였던 나무는 사실 민물가마우지 수백 마리가 가지마다 앉아있어서 만들어낸 형상이었다. 차 소리에 놀랐는지 비명을 지르며 떼지어 나는 모습이 장관이다.
"방조제가 완공된 후 육지로 변한 이 곳을 습지로 조성했어요. 인간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민물가마우지가 왜가리와 백로를 몰아내고 이 곳 터줏대감이 됐지요."(시화호환경관리센터 박용순 차장)
시화호 유역은 이 밖에도 철마다 날아드는 저어서, 검은머리 꼬마물떼새, 황조롱이, 고라니 등 희귀동물의 안식처로 자리잡았다. 10년 전인 1999년에는 닭섬, 개미섬 등에서 1억년 전 백악기 공룡들의 집단 서식지로 추정되는 곳도 발견됐다. 이곳은 자연적으로 숲이 조성돼 이젠 야생동물들의 보금자리로 변하고 있다. 갯벌 속에 묻혀있을 공룡알까지 확인한다면 세계적인 규모의 공룡유적지로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제방을 쌓지 않았다면 바닷물 속에서 오랫동안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을 보물들이다.
상류쪽에는 개발공사 한창
방조제 쪽으로 다가서자 상류 쪽의 자연스러운 맛은 온데간데 없다. 오른쪽에는 호수를 따라 자전거도로가 조성됐고 그 뒤에는 아파트 단지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좀 더 내려가자 시화공단과 반월공단이 호수를 따라 이어졌다. 30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열병합발전소 굴뚝이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호수 위에 설치된 아파트 크기만한 송전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단에서 나올지 모르는 오염물질을 막기 위한 주황색 오일펜스도 보였다. 전방에는 멀리 송도신도시의 초고층빌딩이 들어왔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년 말 완공을 목표로 세계최대 규모의 조력발전소가 건설 중이고 호수 북측 925만㎡ 부지에는 첨단 복합도시인 시화 멀티테크노밸리(MTV) 건설이 한창이다. 호수 일부를 매립해 짓는 MTV 공사 때문에 포크레인과 트럭 등 중장비가 쉴새 없이 움직이며 물막이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공사중인 이 곳에 과연 생명체들이 있을까. 그 순간 호수를 매립해 생긴 황토색 비포장 길 한 켠에 시커먼 물체가 보였다. 민물가마우지 수천 마리가 길을 덮고 앉아 휴식 중이었다.
"이 곳에만 1만5,000마리가 서식하고 있어요. 송전탑 위에 앉아있는 놈들까지 합하면 3만마리 정도는 될 겁니다." 최종인씨의 말이다. 가마우지가 군무를 이루며 날아가기 시작하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공사장 주변에는 맹꽁이 서식처도 널려 있다고 한다.
첨단공장과 야생동물의 서식처가 공존하는 시화호. 도저히 생명체가 뿌리내릴 수 없을 것 같았던 이곳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가고 있지만 아직은 불안하기만 하다. 이제는 인간과 공존해야 할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줘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사진=신상순기자 ssshin@hk.co.kr
■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씨
1989년부터 경기 안산시에 살고 있는 최종인(55)씨는 '걸어 다니는 시화호 사전'으로 불린다. 전문성을 인정 받아 1999년 안산시 공무원으로 채용돼 2003년부터는 생태환경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수시로 시화호 주변을 돌아다니고 사진을 찍는다. 철새조사, 밀렵단속부터 환경교육까지 시화호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그의 손을 거친다.
중소기업 기술부장으로 일하던 최씨가 89년 안산으로 이사 왔을 때 시화호는 그야말로 썩은 물이었다. "생선 썩는 냄새로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물이 빠져 드러난 갯벌은 폐사한 조개로 뒤덮였죠. 생명체라곤 발견할 수가 없었어요."
당시는 방조제 공사중이었고 주변의 공장들이 폐수를 쏟아낸 결과였다. 94년 방조제가 완공된 후 생겨난 시화호의 면적은 여의도 50배에 달했다. 정부는 국토확장과 담수확보를 위해 해수유입을 차단했고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악취가 진동하고 폐사한 조개와 물고기 수십만 마리가 해안가에 쌓이는 일이 반복됐어요. 여기에 공단과 신도시에서 유입된 각종 폐수는 시화호를 회복불능 상태로 빠뜨렸죠."
97년 방조제가 완공됐으나 수질이 악화하자 정부는 98년부터는 방조제 배수갑문을 하루 두 차례 개방했다. 하수처리장 용량을 확대하고 고도처리시설을 도입해 폐수유입을 차단했고 반월천 동화천 삼화천 등 시화호 유입하천에 인공갈대습지를 조성해 수질을 정화했다. 그 결과 수질오염이 절정에 달했던 97년 화학적산소요구량(COD)가 17ppm에 달했지만 현재는 3~5ppm 수준으로 떨어졌다.
2000년 12월 정부는 시화호의 담수화를 포기하고 해수화를 확정했다.
하지만 아직 그는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각종 개발로 새들이 정착할 장소가 급속히 줄고 있습니다. 인공섬이나 습지 등 동물들이 서식할 장소를 우선적으로 조성해야 합니다. 겨우 복원된 생태계가 악화하지 않게 하려면 지금부터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강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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