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쓰는 모든 시들이 유서 같다가 그것들이 모두 연서임을 깨닫는 새벽이 도착한다'('불면의 뒤란'에서)
3년 만에 두번째 시집 <이별의 재구성> (창비 발행)을 낸 안현미(37)씨의 시 세계는 강렬한 기표들이 지배하는 전위의 문법으로도, 상심을 위무하는 서정의 문법으로도 읽을 수 있는 언어로 구축된 세계다. 이별의>
"위험할 정도로 천박해진 거의 시사적인 작금의 문학 신구 구분을 그녀의 시는 아주 가뿐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교란시킨다"는 김정환 시인의 평가는 이번 시집에도 적절하다. 시인 자신의 말로 치환하자면 그의 시집에서는 생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유서'의 언어이기도 하면서, 생의 정당성을 긍정하는 '연서'의 언어들이 자연스럽게 교호한다.
가령 가난의 시절을 회상하는 두 개의 시편, 그 상반된 언어는 그녀의 시가 놓여져 있는 자리를 짐작케 한다.
미술관에서 애인을 만난 뒤 가난한 주택가의 골목길로 들어서던 어떤 봄날의 기억은 '시구문 밖으로 들어서자 시간은 할증으로 포맷되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봄은 춘궁기를 지나가고 있었다'('식객'에서)식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을 보냈던 아현동 산동네를 찾아서는 '그 시절 내 마음에 전세 들어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정하는 밤,… 가난한 추억과 합체하는 밤'('post- 아현동'에서)이라고 쓰기도 한다.
때로 그의 시편에 등장하는 상반된 어조의 화자는 이 시인이 동일한 시인인가를 의심하도록 할 정도다.
'내가 만약 옛사람이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먹을 갈아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와유'에서)와 같은 전통적 여성상과, '여자는 잘린 귀를 확성기처럼 들고 쉭- 태양의 목을 친다'('해바라기 축제'에서)와 같은 공포스러운 여성상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첫 시집에서 선보인 행간 배치의 파격, 동음이의어의 활용, 고사·속담의 비틈 등을 통한 발랄한 언어유희는 새 시집에서도 여일한데 그것은 안씨의 심상치 않은 시적 감각을 확증하는 것.
'한 번 태어났지만 돈이 없으면 두 번도 세 번도 죽어야 하는 세상/ 저녁을 훔친 자들만의 장밋빛 청사진/ 뉴타운 천국//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내 집 주니 셋집 주네?"('뉴타운천국'에서) 처럼, 그것은 현실에서 패배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화할 때 더욱 힘을 얻는다.
2001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안씨는 현재 김근, 김경주씨 등과 함께 '불편'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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