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을 살리기보다는 '4세아'에 먼저 투자를 해달라는 한 신문의 기사를 읽으면서 속이 다 후련했다. 당장 내 일이기도 했다. '4세아'란 만 3살에서 5살의 아이를 일컫는데, '4대강'에 빗대어 급조한 용어인 듯하다. 글쓴이는 그 신문사의 여성 기자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종종대는 엄마를 보았다. 덜 마른 머리카락과 하얗게 들뜬 화장으로 전쟁과도 같았을 엄마의 아침을 읽을 수 있었다. 급한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아이의 발걸음은 느리기만 했다.
기사를 쓴 기자 또한 그런 아침을 보내고 출근했다가 현실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4대강 사업 이야기에 버럭 화가 치밀었을는지도 모른다. 엄마들의 사정은 엄마들이 잘 안다.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엄마들을 만나 처음 물었던 것도 바로 육아에 관한 일이었다. 여성단체이니만큼 엄마들의 사정을 좀 헤아려주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웬걸, 외려 그런 편견을 없애느라 지각과 조퇴 등에 더 엄격하다고 했다. 일하는 엄마는 그런 편견과도 싸워야 한다.
그러니 일하는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것도 당연하다. 언제까지 친정어머니만 믿고 아기를 낳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아파트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는 일은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듣는 일보다 더 희귀한 일이 되었다. 아이들이 없는 사회, 공상과학 소설의 한 장면처럼 끔찍하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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