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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12> 가정교사를 너무 많이 해 후회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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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12> 가정교사를 너무 많이 해 후회스럽다

입력
2009.09.15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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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생활에서 가정교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때는 다들 가난해서 가정교사 같은 것은 이야깃거리가 안 될 수도 있지만 나의 가정교사 경력은 좀 유별났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초에 입주가정교사로 들어가 중학 3학년생을 가르쳤는데, 놀기만 하던 학생을 이듬해 마산상고에 합격시켜서 많은 칭찬을 들었고, 3학년 때도 입주가정교사로 중학 3학년생을 가르쳤다. 마침 장학생인 데다 숙식도 해결되어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내 공부를 할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동국대학에 다니면서도 당연히 가정교사를 했는데, 입학식도 하기 전에 교복을 사러 양복점에 갔다가 가정교사 자리를 구했다. 중학교 2학년생을 포함해 세 명을 가르쳤는데, 너무 힘들었다. 마침 친구가 전문가정교사를 소개해주어 만났는데, 장차관이나 군 장성 자제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보다 열 살쯤 위인 형님이었다.

가르칠 학생은 혜화초등하교 6학년생들로 그 형님의 친동생과 외사촌동생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형님은 나더러 수학을 잘 하느냐고 물었다. 수학은 자신이 있다고 말했더니 초등학교 산수문제 다섯 개를 적은 종이를 주면서 풀어보라고 했다.

세 문제는 풀었는데 두 문제는 풀 수 없었다.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나더러 수학을 잘 한다면서 가르쳐보라고 했다. 자기도 그런 문제를 풀 수 없었는데, 참고서에 해답이 나와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자기 동생들은 전교에서 20등 내지 30등 정도 하지만 가르치게 되면 아주 잘 할 거라고 하면서 가르치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학생들이 공부를 아주 잘 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틀리는 문제는 선생도 모를 수 있다며 내가 해답을 말하지는 말라고 했다.

학생들더러 책과 참고서를 뒤져 답을 찾게 하라는 거였다. 그리고 평소에도 책을 미리 보고 한 번 설명해주고는 문제를 풀어주지는 말라고 했다. 학생들로 하여금 풀게 하라는 거였다.

가르쳐 보니 과연 학생들이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자연과목 '전염병과 그 예방'과 같은 경우 전염병의 증세와 예방약, 치료약을 모두 외우기는 상당히 힘든데도 그것을 미리 외워 두었다가 책을 보지 않고 학생들에게 전부 설명해주고는 그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해답을 말하는 일은 없었다. 학생들로 하여금 해답을 말하게 했다.

이 학생들은 전농동에 본가가 있는데도 혜화초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원남동에서 살고 있었다. 방이 셋인데, 공부방과 잠자는 방이 따로 있고, 학생들 식사와 간식을 준비해주는 부모님이 방 하나를 썼다. 밤 12시까지 공부하고 아침 6시에 일어나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여름방학 때는 경포대 부근에 방을 구해놓고 피서를 하면서 공부하게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데다 학생들이 원체 우수해서 성적이 쑥쑥 올랐다. 석 달 정도 됐을 때 한 명은 전교에서 1등을 하고 다른 한 명은 15등쯤 했다. 서울에서 일류 초등학교라는 덕수, 혜화, 수송에서 약 50명씩 경기중학에 합격하던 때라 당연히 경기중학에 들어갔다. 나는 일약 일류가정교사로 인정받았다.

시험이 끝나고서 그 형님이 자기 동생들 가르치느라 고생했다면서 내 공부도 할 수 있는 곳을 구했다며 경기고 1학년생 집을 소개했다. 대학 기성회장 집 아들인데 수학, 영어, 국어 과목의 경우 경기고등학교 선생님이 1주일에 두 번씩 와서 지도해주어 나는 생활을 지도해주면 되었다. 그러나 입주가정교사로서의 어려움은 여전했다.

서울에 와서 1년 반을 이런 식으로 지내고 나니 공부하러 서울에 왔는지 가정교사 하러 왔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 형님한테 시간제 가정교사를 부탁했더니 아주 좋은 곳을 소개해주었다.

재일거류민단 부단장 집인데 매일 두 시간씩 가르치고 한 달에 1만5,000원을 받았다. 9급 공무원 월급보다 많은 돈이어서 그 돈으로 사설 독서실에 들어가 숙식을 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서울법대에 진학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서울법대에 다닐 때도 물론 가정교사를 했다. 어느 종묘사 회장 집 아들과 딸, 남대문시장의 화장품가게 아들 등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가정교사 해서 번 돈으로 학생운동도 할 수 있었다.

'자유의 종'의 경우 사회법학회 회원들이 이따금씩 돈을 보탰으나 거의 대부분 내 돈으로 만들었다. 정치적인 학생운동을 했지만 정치권으로부터 돈을 받은 일은 전혀 없었다. 학생운동에 돈을 댈 만한 정치인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가정교사란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직업이어서 항상 불안했다. 나의 경우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학생이 싫어하면 그만두어야 했다.

이처럼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10년 넘게 가정교사를 하다 보니 내 공부를 할 시간이 별로 없었고, 당구와 바둑 등 잡기나 여행을 하기는 더욱더 어려웠다. 무엇보다 광범한 독서를 할 수 없었다.

이미 지난 일이고 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을 대라면 가정교사를 너무 오래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침 10년 넘게 징역을 살게 되어 여러 가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든 대학 때든 가정교사를 비롯해 아르바이트를 너무 많이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근본적으로 국가가 학비를 부담하는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대여장학금제도라도 확립해서 돈 때문에 젊을 때의 왕성한 활동이 차단당하는 일은 없게 해야 한다고 본다. 젊음을 사장시키는 건 개인적으로도 손해지만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겠기에 더욱더 그렇다.

물론 젊을 때의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도 있고 젊을 때 고생을 좀 해봐야 의미 있는 삶을 살고 또 인생의 참맛도 알 수 있겠으나, 그것이 젊을 때의 왕성한 활동을 차단할 정도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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