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때부터 학계 인사의 공직 인사청문회에서 흔히 논문 '중복게재'가 논란된다. 이 문제는 인문 사회 자연 기술 공학 예술 등 분야마다 각기 다른 특징이 있어 학계에서도 아직 통일된 개념 또는 기준이 정립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론의 '한 건 주의'와 정치권의 정략적 접근이 어지러운 논란을 부른다. 급기야 '자기 표절'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는 형편이다.
중복게재 오히려 바람직해
먼저 논문 중복게재에 적용되는 원칙과 관행을 살펴보자. 첫째, 통상 동일한 논문을 두 곳 이상에 발표하는 것을 중복게재라고 하는데 동일한 논문도 학회지 이외의 각종 매체에 게재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연구성과는 가능한 많이 알려지는 것이 좋다. 발표 지면만 허용된다면 되도록 여러 곳에 싣는 것이 좋다.
학회지의 경우에도 여러 학회에서 중복게재 기회를 주면 문제가 없다. 학제(學際ㆍinterdisciplinary) 또는 융합 연구가 많은 요즘에는 어떤 논문의 성격을 하나의 영역에 국한된 것으로 정할 수 없다. 따라서 여러 학회지에 싣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연구성과를 신문 방송 학회발표 연설 강연 등에 사용하는 것은 논란할 필요도 없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째, 한글 논문을 영어 일어 독어 불어 등 외국어로 똑같이 번역하여 실어도 문제가 없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국어로 발표한 논문은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서 다시 발표하는 것이 연구결과에 대한 접근과 평가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그게 정직한 학자의 자세이다.
셋째, 발표한 여러 논문을 종합하여 하나의 학위논문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문제가 없다. 충실한 학위논문이 되려면 이 방법이 더 좋은 분야도 있다. 넷째, 논문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논문을 중복 게재하는 경우에 다른 곳에 이미 발표한 사실을 밝혀주면 독자에게 친절한 것일 수 있지만, 반드시 명기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중복게재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중복게재가 아니라 동일한 논문을 중복하여 평가하는 것이다. 동일 논문의 중복 평가는 인정되지 않는다.
표절은 남의 연구성과를 자기 것으로 속이는 행위이기에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연구결과를 자기가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지 파렴치한 표절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표절'이라는 개념은 애초 성립하지 않는다. 먼저 발표한 논문의 일정 부분을 후속 논문에 반복하는 것도 금지되는 것이 아니다. 전시회 발표회 공연 등에 얼마든지 동일한 것을 반복할 수 있다.
분야에 따라서는 다르겠지만 이런 경우에도 하나의 연구성과는 한번만 평가해야 하고 중복하여 평가해서는 안 된다. 앞선 논문의 내용을 후속 논문에 어느 정도 반복하여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연구성과를 100%로 평가할 것인지, 50%로 할 것인지 반영지수가 달라질 뿐이다. 자신의 이론이나 학설을 계속 발전시켜 발표하는 경우에는 앞선 연구 내용의 일정 부분을 반복해 사용할 수 있다.
올바른 이해와 이성적 논의를
공동연구인 경우에는 아이디어와 연구작업 등 여러 단계에서 공동ㆍ 참여 행위가 있게 된다. 분야에 따라서는 학위논문 지도도 지도교수의 아이디어 제시와 연구ㆍ실험 지도 등을 통해 성과를 다양하게 공유한다. 그러므로 지도교수와 학생의 공동명의로 발표한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명의로 발표하는 것이 연구결과에 대해 학자로서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정직한 자세이다. 다만 연구평가에서 참여자 각각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기여도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을 뿐이다.
이와 같이 학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논문이 여러 개의 논문을 쓴 것처럼 평가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논문을 중복하여 게재했느냐, 자기 연구성과를 다시 사용했느냐를 어지럽게 논란할 게 아니다. 이런 원칙과 사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성적인 논의를 하기 바란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 · 새사회전략정책硏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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