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각색하면 현장의 분위기는 이랬다.
#'20년간 기름밥을 먹었다. 말이 좋아 '수출역군'이지 시나브로 기계의 일부가 된다. 원가절감을 외치는 회사와 영 맘에 안 차는 신참들…. 기대는 없다. 그저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되는 것. 작업능력이 숙련되는 만큼 말은 사라진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 포기다.'(고참 근로자)
#'도무지 말을 꺼낼 수가 없다. 호칭만 반장이지 나이는 아버지뻘이니 말 붙이기도 쉽지 않다. 어렵사리 꺼내봐야 날아오는 건 핀잔과 욕설, 밀려오는 자괴감…. 기대는 잊었다. 그저 주어진 일이나 잘하자. 업무가 손에 붙는 만큼 혀도 굳는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 강요다.'(신입 근로자)
'그들'이 왔다. 그리고 10개월 후.
#작업반장: "아랫것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니까. 그것도 진심으로, 아니 습관이 됐어. 뚱하고 있던 신참 녀석들에게 작업개선 도구를 만들라고 시켰거든. 솔직히 기대는 안 했고, 미워서 그런 거야. 그런데 깜짝 놀랐어. 나는 20년간 생각도 못했던 걸 고 녀석들이 만들어 온 거야. 그게 우리 표준이 돼서 전 공장에 보급됐잖아. 얼마나 예뻐, 감사하지."
#신참: "저도 놀랐어요. 말문이 트이니까 아이디어가 샘솟아요. 가만 있을 수 없어 점심시간을 쪼갰죠. 회사 쓰레기통 뒤져 자재 구하고 설계하고 용접하고 뚝딱뚝딱 지게차 물품보호대를 만들었더니 글쎄 맨날 무섭게 노려만 보던 반장님이 '고맙다'고 하네요. 저도 존경해요."
사실 변화는 이미 우리 속에 내재해있다. 다만 그 에너지를 눙쳐두거나 팍팍한 일상에 치여 잊고 지낼 뿐. 오죽하면 득도를 발원하는 스님들도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할까. 이발사 역할이 필요한데, 반목과 질시 침묵이 드리운 조직 내부에선 적임자를 찾을 수 없는 게 또 현실이다.
그래서 오퍼레이션 컨설턴트라 불리는 '그들'이 필요하다. 변화의 비결은 뭘까. 네오플럭스 컨설팅(본사는 서울)의 박영철 팀장, 민현기 이범주 정진하 위원을 현장에서 만났다. 그들은 10개월이나 경남 창원시의 두산엔진에 상주(파견 형식)하며, 통합현장혁신(IFI)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첫인상은 작업복에 안전모 장화까지 갖춘, 말투도 영락없는 현장직원이었다. 양복차림에 잘 정돈된 머리와 반짝이는 구두 등 흔히 떠올리는 컨설턴트 이미지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게다가 '오퍼레이션' '통합현장혁신'란 난해한 용어는 또 뭔가.
박 팀장의 설명부터 들어보자. "블루칼라 변화 프로그램이다. 일의 의미와 개선방법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생산성이나 품질 향상, 원가절감을 목표로 하는 기업경영전략 컨설팅과는 다르다." 의미가 썩 와닿지 않지만 확실한 건 당장 돈이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
혁신 방법도 숫제 뜬구름 잡기다. "토론을 시켜요. 개입은 자제하죠. 자기 위치에서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상명하달이 아니라 근로자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박) 작업하기도 바쁜 와중에 한가하게 토론이라니, 목표는 그럴싸한데 도무지 납득이 안 간다. 차라리 수치를 제시하라고 했더니 "근로자 560명이 있다면 가족을 포함해 2,000명을 변화시키는 일"이란다. 갈수록 가관이다.
이러니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근로자들이 '그들'을 받아들일 리 없다. "(두산)그룹 전략기획실 같은 데서 보낸 염탐꾼"(이 위원), "업무도 모르는 외부인"(민 위원), "인사도 받아주기 귀찮은 천덕꾸러기"(정 위원)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은 다 예상하고 있었다. 개의치 않고 차근차근 보따리를 풀어갔다. 과연 '자발적인 토론'만으로 서릿발 같은 상명하복이 짓누르고, 각자를 거대한 쳇바퀴 공정의 일부로 여기는 조직이 변할 수 있을까.
먼저 70개의 작은 그룹을 일일이 찾아가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560명) 면담했다. 안 만나주면 3번이고 4번이고 찾아갔다. 절대 일에 대해선 아는 체 하지 않았다. "지도하러 왔다는 인상을 주면 백전백패니까."(박) 쉽지는 않았다. "약속을 3번이나 미룬 반장 옆에서 몇 마디 붙이고 돌아오는 게 초반엔 보람이었다"고 할 정도. 신뢰 쌓기라 부르는 이 과정은 무려 3달이 걸렸다.
만나는 틈틈이 '그들'은 그룹별로 70개의 혁신방안을 짰다. 조각조각 흩어진 근로자 개개인의 생각을 짜깁기해 하나의 비전을 끄집어내는 지루하고 정교한 작업이다. 컨설턴트들은 그사이 현장사정을 이해하게 되고, 어려운 작업용어도 습득하게 된다. 업무시간엔 사람들 만나느라 처리할 수 없는 일인지라 대부분 숙소에 돌아가 잠을 잊고 회의를 진행한다.
7개월은 혁신방안을 기초로 각 그룹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찾아서 하게한다. '그들'은 그저 멍석을 깔아주고 토론에 참여할 뿐이다. 그러나 평소에 말도 안 나누던 근로자들에게 토론이란 어색한 자리가 달가울 리 없다. 고참은 신참이 미덥지 않고, 신입은 선임들이 무섭다. '그들'은 진득하게 기다린다, 말문이 트일 때까지. 토론은 매일매일 계속된다.
기다림은 결국 열매를 맺는다. 삐걱거리는 토론을 통해 마지못해 합의한 정리정돈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점차 더 큰 일을 하게 된다. 주어진 작업 외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신입직원들이 작업개선도구를 만들고, 윽박지르기만 하던 고참들은 공정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찍거나 강사로 나서 살갑게 일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 무미건조하던 작업장엔 어느덧 감사와 존경, 자신감이 스며든다.
토론만으로 놀라운 변화가 가능하다니 믿기지 않는다. "돈을 주고 근로자의 손과 발을 썼지, 정작 중요한 머리는 공짜인데 쓰지 않았다. 월급 받고 8시간 일하는데 만족하는 근로자는 없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산 것일 뿐." 잠재력만 일깨워준다면 '작업과 개선'은 함께일 수 있다는 게 박 팀장의 설명이다.
그래서 오퍼레이션 컨설턴트의 매력은 미묘하다. "원가절감은 통계를 뽑아 각 공정의 누수를 막으면 그만이지만 IFI는 각 개인과의 신뢰 및 교감을 통해 보이지는 않지만 분위기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10개월 넘게 가족과 떨어져있어야 하고"(민), "근사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나 분석하는 일이 아니라 작업복 갖춰 입고 몸으로 부딪혀야"(정) 한다. 몸과 맘은 고되지만 현장의 변화를 맛본 이상 헤어날 수 없다. '그들'은 벌써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창원=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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