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계의 김구라'로 통하는 입담 좋은 해설자 김성룡 9단이 최근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해외 바둑 보급을 꿈꾸는 국내 바둑인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코스처럼 된 '한상대 바둑영어교실'에 8월 말 정식으로 등록한 것이다.
"갑자기 웬 영어 공부냐"고 물었더니 "국내에선 점점 먹고 살기가 힘드니 빨리 다른 길을 찾아 봐야죠"라는 농반진반의 대답이다. 김성룡이라면 일찍이 보급 기사를 자처하며 TV 해설 쪽으로 전향, 한때 타이틀 보유자 못지 않은 수입을 올린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로 잘 나갔던 인물이다. 그러나 요즘 바둑계를 보면 시대가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다 고 했다.
한동안 무풍지대였던 TV 해설에도 이제는 후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새로운 길을 찾아서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게다가 큰 아이가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다는 것도 '새로운 행마'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됐다.
이미 진출 예상지도 대충 정해 놨다. "호주나 뉴질랜드 싱가포르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최우선적으로 영어 실력을 늘릴 필요를 느껴 한상대교실을 찾게 됐다는 것.
김성룡은 바둑계에서 가장 먼저 컴퓨터를 이용해 기보를 정리했고 10대 소년 시절부터 증권 투자를 했을 정도로 프로기사 중에서는 비교적 세상 물정과 세태의 흐름을 파악하는 눈이 밝은 사람이다. 일찍이 남들이 선뜻 가려 하지 않았던 '해설 전문'의 길을 택해 대박을 터뜨렸던 김성룡이 이번에는 해외 보급에서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 바둑의 세계화는 우리 바둑계의 해묵은 화두다. 바둑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사안이다. 그러나 아직도 말만 무성할 뿐 제도권 내에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 방안이 나와 있는 게 별로 없다. 현재로서는 젊은 프로기사나 아마 강자들에게 '용감하게 보다 넓은 세계로 나가라'고 권면하면서 해외 바둑 보급에 가장 필수적인 무기인 바둑 영어를 '손에 쥐어 주고 있는' 한상대(68) 교수가 실제 현장에서 발로 뛰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1975년부터 20년 간 호주에 살면서 시드니대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는 한편, 바둑 불모지였던 호주에 한국 바둑을 알렸다. 호주바둑챔피언십에서 12번 우승했고 세계아마대회에 호주 대표로 6번 출전했으며 호주바둑협회장까지 지냈다. 귀국해서는 명지대 바둑학과에서 바둑 영어와 영미 문화를 강의하다 2004년 10월부터 바둑영어교실을 열었다.
한상대교실에서는 완전 초보자가 일상 생활에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이른바 '생존 수준'(survival level)까지 도달하는 데 대략 300시간 정도의 학습이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1주일에 2회, 한 번에 2시간씩 1년 정도 공부하면 영어로 기본 회화는 물론, 바둑 강의와 복기가 가능하다. 정규 과정을 이수한 후 소정의 시험을 통과하면 대한바둑협회가 인정하는 국제바둑보급사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
한상대교실의 한 달 평균 수강생은 20명 내외다. 수강생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스무 살 안팎의 청춘남녀들은 대부분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 아마 강자 아니면 명지대 바둑학과 학생이다. 둘을 겸하고 있는 이도 여럿이다. 김형환(4단) 조미경(초단) 등 젊은 프로기사들도 있다. 일반인들은 회사원, 자영업자, 전문직 종사자 등으로 3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데 전에는 60대의 은퇴한 교수도 찾아와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5년 동안 어느덧 200여명이 정규 과정을 이수했다. 실제로 프로와 아마를 막론하고 현재 나라 밖에서 열심히 한국 바둑을 알리고 있거나, 앞으로 알리려 하거나, 혹은 전에 알렸던 바둑 전도사들은 거의 전부가 한상대교실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함부르크를 거점으로 삼아 유럽 바둑계 전체를 대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류 프로 윤영선 5단과 1년 전에 호주로 건너간 안영길 6단, 한동안 베를린에서 활동하다 귀국해 병역을 마치고 이번에는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간 황인성 아마 7단,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오은근 아마 6단, 조석빈 홍슬기 김중엽 장비 아마 7단 등 현재 외국에서 바둑 사범으로 일하고 있거나 진출 준비 중인 바둑인들이 모두 한상대교실에서 영어를 익히고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배우면서 '한국 바둑 세계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눈을 뜬 젊은이들이다.
실질적으로 한국 바둑 세계화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는 한 교수는 "해외에 나가 보면 우리나라가 그동안 바둑 보급을 얼마나 소홀히 해 왔는지 누구나 금방 느낄 수 있다"며 "모두들 바둑이 올림픽 종목에 들어가야 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70년대 한국의 태권도 사범들이 엄청나게 많이 해외로 나가 활동한 덕분에 태풩뎔?가라데를 누르고 올림픽 종목이 될 수 있었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룡) 프로가 공부 열심히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이제 불과 두어 번 강의를 들었는데도 스스로에 대한 모티베이션(동기 부여)과 열정이 대단해 학습 진도가 놀랍도록 빠르다"는 대답이다. 한상대교실(010_6286_5878)의 강의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영빌딩 지하 1층에서 열린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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