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왔다. 가을 정취가 묻어나는 은은한 갈색 주전자를 희고 긴 손가락으로 살포시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전자를 기울일 땐 새끼손가락을 살짝 올렸다.
새침한 것도 같고 우아한 것도 같다. 세세한 동작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는 한지선(23)씨는 차 소믈리에다. 따뜻한 온기가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이 계절에 어떤 차가 잘 어울리는지 물어봤다.
가을에 어울리는 차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한 선비가 배탈이 났다. 지나가던 스님이 절벽에서 따온 찻잎을 우려 마시게 했다. 병도 낫고 머리도 맑아진 선비는 장원에 뽑혔다.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홍포)을 가져와 절벽의 차나무에 덮었더니 해마나 검붉은 잎이 났다. 그 잎을 우려 마시는 차가 바로 대홍포차다.
선비 이야기는 대홍포차에 얽힌 중국 전설이다. 한씨는 "위에 좋고, 눈에 좋으며, 노화도 막아 준다"며 대홍포차의 효능을 조곤조곤 소개했다.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우롱차를 권했다.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지방을 분해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철관음차도 잘 어울린단다. 은근한 단맛이 나며 마신 뒤에도 입안에 한동안 과일 향이 머문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 기 때문에 특히 여성에게 좋다는 이 차는 중국의 10대 명차 가운데 하나다.
한씨가 개인적으로 즐기는 차는 철관음차. 중국에서 다예(茶藝)를 공부할 때 이 차를 식전에 마시고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빈속에 마시면 안 좋다는 걸 그땐 몰랐다는 것.
철관음차 대홍포차 우롱차는 가공 방법이나 발효 정도에 따른 차 분류상 청차(靑茶)에 속한다. 공복에 청차를 마시면 어지럼증이나 구토가 생길 수 있다. 카페인 성분이 꽤 들어 있어 자기 전에도 삼가는 게 좋다. 또 차게 마시면 위에 무리가 가기도 한다.
차도 맞춤형 서비스 시대
최근 호텔이나 차 전문점을 중심으로 한씨 같은 차 소믈리에를 둔 곳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차 강국인 중국에서 주로 공부하고 온 이들은 손님의 나이나 건강 상태, 먹은 음식에 맞는 차를 선택해 전문적으로 서비스한다. 잘 알려진 와인 소믈리에와 비슷한 역할이다.
한씨는 임피리얼 팰리스호텔에서 일하던 중 호텔을 방문한 중국 다예사를 통해 처음 차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 길로 중국으로 건너가 다예사에게서 차의 기원부터 우리는 기술, 다기 사용법 등을 도제식으로 교육받은 뒤 2007년 8월 중국의 인력 관리 기관인 직업기능감정중심의 인증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은 같은 호텔 중식당에서 2년 반째 차 소믈리에로 일하고 있다.
그는 해삼송이나 해삼전복 같은 볶음요리를 먹은 손님에게는 청차, 샥스핀이나 해파리냉채를 먹은 사람에겐 녹차를 많이 권한다. 탕수육 깐풍기 새우튀김처럼 기름기 많은 고기류나 튀김류를 많이 섭취한 경우엔 보이차 같은 흑차(黑茶)를 선택해 준다.
한씨가 마지막으로 추천한 가을 차는 바로 보이차다. 보이차를 비롯한 흑차는 찻잎을 수년 동안 쌓아 두고 발효시킨 다음 우려내 찻물 빛깔이 유달리 진하다.
지방을 분해하고, 혈액 순환을 도우며, 무기질과 섬유질이 많아 변비에도 좋단다. 천고마비의 계절, 후식으로 보이차 한 잔이 잘 어울릴 듯하다.
잡념 없이 섬세한 손놀림으로
한씨는 식당에서 항상 전용 카트를 끌고 다니며 서비스를 한다. 손님마다 다른 차를 대접해야 하고 계속 물을 끓여가며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트에는 다양한 종류의 찻잎과 다기(茶器)는 물론, 작은 가스레인지까지 갖춰져 있다.
그는 "녹차는 너무 뜨거운 물에 우리면 쓴맛이 나니 80도 정도 온도가 적당하다"며 "하지만 보이차는 발효 과정에서 이물질이나 균이 들어갈 수 있으니 팔팔 끓는 물에 우려내는 게 좋고 청차를 우리는 물은 그 중간인 95도면 된다"고 조언했다.
20대 중반, 젊은 나이다. 그러나 차를 서비스할 때만큼은 늙은이 같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찻잎을 꺼내거나 주전자 뚜껑을 여는 동작도 하나하나 세심하게 다듬었다"는 그는 "그런 의미에서 차 소믈리에는 무념이고 배려다"고 말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 차 맛있게 마시는 방법, 처음 우려낸 물은 버리세요
차 한 잔을 마시더라도 더 맛있게, 더 우아하게 마실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터.
차 소믈리에 한지선씨는 "차는 종류가 무수히 많은 데다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아 어렵게 여기는 사람이 아직 많다"며 "향이나 맛 그대로 느끼면서 자주 마시면 차 문화에 익숙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씨는 차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평소 알아 두면 좋을 만한 몇 가지 팁을 알려줬다.
먼저 차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다기가 있다. 가장 흔히 마시는 녹차는 열기를 빨리 식혀 줄 수 있는 유리잔이 적합하다. 물이 뜨거우면 쓴맛이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청차는 보온성이 뛰어난 자기(磁器), 보이차는 향이나 색이 잘 유지되는 도기(陶器)에 마시면 더욱 좋단다.
차를 우릴 때 쓰는 주전자(다관)는 부피가 보통 맥주잔 한 잔 안팎이다. 이 정도 양의 물이면 녹차는 찻잎을 6~8g, 보이차는 10g, 우롱차는 12~14g 넣는 게 가장 맛과 향이 좋다고 한씨는 설명했다.
찻잎을 처음 우려낸 물은 마시지 말고 바로 따라 버려야 한다. 이 과정을 차 전문가들은 '세차(洗茶)'라고 부른다. 세차를 하면 찻잎을 따거나 가공할 때 혹시 들어갔을지 모를 불순물이 제거돼 더 깔끔한 맛이 난다. 특히 오랫동안 발효시킨 보이차는 두 번 세차하는 게 좋다.
찻잎은 입구를 단단히 봉한 통에 넣어 서늘한 곳에서 보관해야 한다. 단 우롱차는 진공 포장이나 냉장보관한다. 발효시켜 만드는 차는 오래 될수록 깊은 맛을 내지만 다른 차는 개봉 후 1년 이내에 마시시는 게 좋다. 한 해를 넘기면 찻잎이 마르면서 향도 옅어진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