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그룹 '2PM' 리더 재범(22ㆍ본명 박재범)이 한국 비하 발언 논란이 터진 지 4일 만인 8일 그룹을 탈퇴하고 한국을 떠났지만, 적지 않은 숙제를 우리 사회에 남겼다. '최첨단 인터넷 환경' 속에서 '다문화 국가'로 빠르게 나아가는 한국 사회에 민족주의와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 인터넷 사생활 침해 등 잠재됐던 뇌관이 복합적으로 터졌다는 지적이다.
"Korean is gay"(한국인은 역겹다) "I hate Korean"(한국인을 혐오한다) 등 재범이 2년여 전 남긴 글에 대한 네티즌들의 분노는 폭발적이었다. 5일 이를 보도한 한 기사에 무려 1만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고, 포털 다음 아고라의 청원란에선 '재범을 추방하자'는 제안에 1만명이 서명했다. 이에 대해 "천박한 민족주의가 빚은 일" "집단 애국주의의 과잉" 등의 비판이 나오고 있지만, 최근 불거진 '미녀들의 수다' 출연진 베라의 한국 비하 논란 등 그간 심심찮게 나온 '한국 비하' 논란 때와는 분노의 폭과 결이 확연히 달랐다.
무엇보다 발언의 당사자가 한국인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닌, 국내서 활동하는 '젊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 때문이다. 많은 네티즌들이 "한국인이 '한국이 싫다'거나 외국인이 '한국인이 역겹다'고 할 때와는 다른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도 결국 이들의 이중적 위상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출입국이나 국내 취업 활동 등에서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활동하면서도,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점이 새삼 환기된 것이다. 수많은 비난 댓글들이 '제2의 유승준'을 거론하며 "재범은 한국에 돈 벌러 온 미국인일 뿐이다" "군대 가면 용서해 준다" 등 국적과 병역 문제를 결부시켰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들의 위상이 계층 문제와 결부돼 분노가 증폭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정 출산 등으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 병역을 면제받은 뒤 한국에서 활동하는 상류계층이 느는 상황에서 재범의 발언이 이들과 오버랩 돼 '88만원 세대'의 박탈감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김성일 문화사회연구소장은 "젊은 세대들은 사회 양극화로 더욱 각박하게 살고 있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다는 인식 등으로 질시 어린 동경이 배신감으로 인해 분노로 바뀌었다"며 "다문화ㆍ양극화 사회에 진입한 이상 제2, 제3의 재범이 언제든 나올 수 있다"고 전했다.
재범이 2~4년 전 싸이월드와 비슷한 사적인 공간에 남긴 개인적 푸념이 집단 공격의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인터넷 파시즘'의 징후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대중문화평론가 권경우씨는 "검찰이 최근 PD수첩 수사에서 수년간의 개인 이메일을 뒤져 일부 내용을 공개한 것이나, 네티즌과 언론이 수년 전 쓴 사적인 글을 퍼날라 공론화한 것이나 어찌 보면 비슷한 행위"라면서 "인터넷에서도 사적인 공간은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수 년 전 인터넷에 남긴 글까지 뒤져 영구적인 족쇄를 채우는 '현대판 주홍글씨'에 대한 우려도 높다.
건전한 비판과 논쟁이 실종되고 극단으로 치닫는 '인터넷 쏠림 문화'에 대한 우려도 크다. 박천욱 인터넷문화협회 사무처장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글로 감정을 부추기다 보니 올바른 토론이 이뤄지지 않는다"며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성숙된 인터넷 문화 형성도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문준모기자
박민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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