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우리 일상에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영어는 이미 입시, 취업 등의 결정적 변수가 됐고 개인 혹은 국가 경쟁력의 척도가 됐다. 상상을 초월하는 돈, 시간, 노력을 쏟으면서도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게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다.
우리나라가 유별나고 지나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라고 해서 영어에 무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국가교류가 활발해질수록, 인터넷 등을 통한 정보교류가 확산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영어에 빠져든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제 지역 혹은 제 국가 언어보다 영어 익히기에 더 몰두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영국의 언어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앤드류 달비는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그는 저서 <언어의 종말> (2002∙작가정신 발행)에서 현재 모국어 혹은 제1외국어로 사용되는 5,000여 종의 언어 가운데 2,500여 종이 향후 100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2주에 한 개 꼴로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다. 언어의>
달비의 전망에는 나름의 역사적 근거가 있다. 로마제국 시대 지중해 언어의 사멸 과정이 그것이다. 기원전 100년에만 해도, 이베리아 반도의 10개 언어를 포함해 지중해 권역에는 60개 정도의 언어가 있었다.
하지만 600년이 지난 기원후 500년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만 살아 남았다. 로마제국 황실과 행정 언어였던 라틴어는, 제국의 확대에 맞춰 언어적으로 크게 번성한다. 복속 지역 주민들은 로마시민 자격을 얻기 위해, 군인이 되기 위해, 관료가 되기 위해, 무역을 위해 라틴어를 익혔으며 후손에게도 라틴어를 습득하도록 했다.
당시의 라틴어는 그래서 개인의 경쟁력을 의미했다. 로마가 라틴어 사용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해서 제 언어를 배울 기회도, 동기도 잃어버렸다. 그리스어가 살아 남은 것도 로마 때문이다. 로마인은 그리스어를 교양의 상징으로 여겼고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그만큼 높이 평가했다.
현대에 와서 라틴어의 자리는 영어가 대신하고 있다. 교역에서, 국제회의에서, 학문에서, 신문과 TV 등 미디어에서, 인터넷에서 영어가 중심 언어가 되고 있다. 하나의 언어가 이처럼 많은 나라에서 공식적이고 교육적인 기능을 담당한 것은 전례가 없다.
달비에 따르면 영어의 확산은 라틴어의 그것과 여러 면에서 닮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식민화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케냐 등 전 세계에 영국 식민지가 있었다. 미국도 적지 않은 식민지를 두었다.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는, 지중해권으로 한정된 로마의 식민지보다 훨씬 넓었다.
로마에서 라틴어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 식민국가에서 영어는 지위 향상과 부를 얻는 주요 통로였고 교육과 문화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됐다. 인도만 해도 매우 강한 토착문화가 있었지만 일정 수준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영어를 알아야 했다. 고등교육 역시 영어로 이뤄졌다.
식민지배를 경험했으나 언어적 통일성을 갖추지 못한 나라들도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했다. 심지어 영국 혹은 미국의 속령이 아니었던 나라에서도 영어가 제2의 언어로 채택됐다.
하지만 특정 언어의 득세를 달비는 매우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영어 같은 언어가 확산되면 확산될수록 소수 언어는 설 자리를 잃고 결국 종말을 맞을 것으로 전망한다. 달비에게 언어의 감소는 문화의 감소다.
그것은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 고유한 문화와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독특한 사고체계, 대대로 내려오는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에 언어가 사라지면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고유의 지식과 사고체계가 사라지고 결국 인류는 문화적으로 획일화하고 퇴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달비의 주장이다.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미래가 위협받는 일이라고 달비가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걱정이다. 언어의 쇠퇴는 당장 영어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어 역시 다른 언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어휘를 확장하고, 더 유연하고 창조적이 됐다. 하지만 다른 언어가 사라지면 영어는 새 어휘와 새로운 생각들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막힌다.
달비는 책에서 영어가 지구의 유일한 언어가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어의 종말> 을 읽으면 그가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영어가 더 많은 나라에서 국가어로 혹은 제2, 제3의 언어로 지금보다 더 빨리 더 넓게 확산될 것으로 전망한다. 언어의>
세계 차원의 비즈니스와 세계적인 미디어가 점점 더 활발해질 것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화 자체가 종식되지 않는 한 영어가 더욱 확산될 것으로 전망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앤드류 달비 - 영국 언어학자이자 역사학자
1947년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난 언어학자이자 역사학자, 번역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등을 공부했다. 다중언어를 주제로 많은 글을 썼으며 고대 역사와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1998년에 <언어 사전> 을, 2002년에는 <언어의 종말> 을 발간했다. 1995년에는 음식의 역사를 다룬 <사이렌의 연회> 를, 2001년에는 향신료의 역사를 다룬 <위험한 미각 : 향신료 이야기> 를 쓰기도 했다. 위험한> 사이렌의> 언어의> 언어>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 국내언어학자들이 보는 한국어의 미래
앤드류 달비는 경제 논리에 따라 세계에는 아주 소수의 언어만 남게 될 것이며, 소멸된 언어가 저장하고 있던 문화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문화는 모국어를 통해 후대로 전수되고, 다른 나라와도 교류하기 때문에 언어의 소멸은 결국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메커니즘의 소멸과도 같다는 것이다.
국내 언어학자들은 우선 디스토피아적인 달비의 주장이 과장 아닌 실제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주원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는 "2주에 1개 꼴로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유네스코의 통계"라면서 "1만명의 사용자가 남아있는 언어라 해도 그 대부분이 노인이기 때문에 그들이 죽으면 언어는 사라진다"고 말했다.
알타이어를 연구하는 김 교수는 "소수 민족의 대언어 선택은 생존과 직결돼 불가피한 것이므로 비판하기 어렵다"면서 만주어가 1911년 청나라의 몰락으로 100년도 안돼 사라져버린 사례를 들었다. 러시아, 중국 치하에서 언어통합이 일어나 만주족 1,000만 인구 중 현재 만주어를 읽고 쓰는 사람은 70대 이상 노인 10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익환 상명대 석좌교수는 "20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화가 언어의 소멸을 가속화시켰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화는 경제, 정치,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소수 민족은 자기 언어를 경시하고 대언어를 배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어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이상규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는 "인터넷의 발달로 소수자의 언어는 소통에서 열악한 위치에 놓였다"면서 "한국어도 200~300년 후엔 사라질지 모른다"고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출산율 저하로 인구가 감소하고, 외래어 유입이 심화되면 고유어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외래어가 많은 경제신문의 경우, 산골에 사는 할머니들은 읽을 수도 없다. 이미 한국어는 사멸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제주도에서 연령대별 방언 인지도를 조사했을 때 20대는 20%도 알지 못했다는 결과도 소개하면서 "표준어와 방언의 관계는 영어와 한국어의 관계와 동일한 패러다임을 적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이익환 교수는 "한국어를 쓰는 인구는 8,0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지구상 수천 개의 언어 중 15위에 해당한다"며 한국어가 소멸할 것이라는 예상은 기우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이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을 때 영어가 공용화될 것이라 누가 예상했겠느냐"며 "한국어의 미래도 속단할 수 없다"고 부연했다.
지난달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이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할 공식 문자로 한글을 채택한 것도 한 예가 된다. 이 교수는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인도네시아, 태국 등 오지에서 언어를 채집하는 등 소수언어 보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미국 언어학회는 연구비를 조성해 미국 내 인디언들의 언어를 보존하는 데 투자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이상규 교수는 "소설가 고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 이 우리의 고유어를 회생시켰던 것처럼, 문학인들을 중심으로 고유어를 지키고 창조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혼불>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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