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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12>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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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12>우표

입력
2009.09.0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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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순해지고 바람도 제법 냉기를 품기 시작한다. 나무와 풀들이 제 몸을 말릴 채비로 분주해지는 이맘때면, 계절의 감성에 예민한 마음들은 오히려 눅눅히 가라앉곤 한다. 상투적이지만,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기 딱 좋은 계절이다.

'가을'과 '편지'라는 사뭇 먼 두 단어가, 동서를 막론하고 이리 길고 질긴 인연으로 어울려온 것, 낙엽이 두 단어를 함께 품는 만고의 상징으로 복무해온 것, 그것은 뿌리 있는 생명들의 물기가 뿌리 없는 인간의 세포 속으로 삼투한 결과인지 모른다. 어쩌면 가을과 편지의 인연은 인간의 문학적 감성이 아니라 신의 말씀 혹은 자연의 섭리가 만들어낸 숙명인지 모른다.

바람이 제법 쌀쌀하던 며칠 전 새벽, 우연히 튼 라디오에서 한 여성 진행자가 눅눅한 음성으로 천양희 시인의 시 '우표 한 장을 붙여서'를 낭송했고, 출근길 내내 그 시에 담긴 몇몇 시어들과 가을, 낙엽, 우표, 편지 따위의 감상적인 단어들을 되새김질했다. 계절 탓일 것이다. 그러다 내친 김에 이 마당에 우표를 초대하기로 했다.

사전은 우표를 '우편요금을 낸 표시로 우편물에 붙이는 증표'(네이버 국어사전)라 밝힌다. 기능과 사용가치에 근거한 이 정의가 부여한 우표의 자리는 그리 너르지 못하다.

'요금 별납' 혹은 '요금 후납'이 찍힌 스탬프나 '요금증지'(스티커) 등 우표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우편 서비스가 등장한 지 오래다. 아니,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편지 봉투에 우표 붙여서 우체통 찾아 넣는 수고 자체가 크게 줄었다. 이제 누구나 어지간하면 '메일'을 쓰지, '편지'를 쓰지는 않는다.

또 우표는 국가가 발행하는 가장 작고 헐한 유가증권이다. 최저가 10원. 우표를 제작하는 한국조폐공사 사업처 관계자는 '공공기관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를 들어 영업비용은 '비공개 대상 정보'에 해당한다며 우표 제작 원가를 밝히지 않았지만, 보나마나 액면가는 훨씬 웃돌 테다. 대체수단이 널려있다는 점에서 우표의 사정은 10원짜리 동전화폐와도 사뭇 다르다.

해서 우표는 수요자에게서도 공급처로부터도 그리 푸근한 대접을 못 받는다. 우정사업본부가 발행한 '2008 우편통계편람'에 따르면 지난해 발행된 우표는 보통ㆍ기념우표를 합쳐 약 2억2,200만 장.

5년 전인 2003년에는 2억9,600만 장, 2005년에는 2억7,500만 장이었다. 전국의 우체통 수도 해마다 줄어 4만여 개가 넘던 게 현재는 1만7,000여 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안쓰러워진 우표의 처지를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게 있는데, 바로 '인터넷 우표'다. 인터넷 우체국에 접속해 우표를 구매한 뒤 프린트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인터넷 우표는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쓰이고 있고, 한국의 우정사업본부도 이르면 내년부터 상용화한다는 계획을 잡고 시스템 개발에 한창이다. 비용과 효용 면에서 우표는 인터넷 우표에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경제논리로 보자면 우표는 사양품목이다.

우표는 크게 보통우표와 특수우표(기념우표, 특별우표, 시리즈우표, 연하우표, 공동우표)로 나뉜다. 보통우표는 우표 수급상황에 따라 수시로 제작된다. 반면 특수우표의 대표 격인 기념우표는 어떤 행사나 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해당 기관이 사전에 신청하면 학계와 문화ㆍ예술계 인사 20명으로 구성된 우표발행심의위원회가 심사를 거쳐 선정한다.

특별우표는 우정100년 기념 등 우정본부가 기획한 기념우표이고, 공동우표는 국가수교 기념우표처럼 두 당사국이 디자인과 제작 과정을 협의해 공동으로 발행하는 우표다. 연간 우표발행 계획은 즉각 우표디자인실로 전달되고, 완성된 우표 도안은 한국조폐공사로 옮겨져 제작된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우정사업본부 우표디자인실. 6명의 디자이너들이 내년도 우표 디자인을 위해, 그들이 즐겨쓰는 표현대로 '작은 네모 속 큰 세상'을 창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김소정(39)씨는 입사한 지 10년이 넘는 베테랑 우표 디자이너다. "내년 8월에 세계산림협회 세계총회가 한국에서 열려요. 그 기념우표를 디자인하고 있는데, 지금 생각하는 컨셉트는 생명과 숲의 공존입니다.

그림 조각들이 하나하나 맞춰지면서 아름다운 그림을 이루는 직소퍼즐처럼, 인간과 동물, 곤충들이 모여 거대한 생명의 숲을 이루게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그 '거대한 생명의 숲'을 그는 가로 세로 35mm의 8각형 캔버스 안에 담을 계획이다.

작은 네모 속 큰 세상에 매료된 사람들은 또 있다. 우취(郵趣)인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스탬프 컬렉터(stamp collector)가 아닌 '필라텔리스트'(philatelist)라 부른다. 100여 년 전 한 조壕?우표수집가가 그리스어로 사랑이라는 뜻의 'philo'와 세금면제라는 뜻의 'ateleia'를 합쳐 만들어 세계적으로 통용돼 온 단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엔 '한국우취연합'이 있다. 전국의 크고 작은 필라텔리(philately·우표수집) 단체 61개가 모여 결성한 순수 민간단체다. 그 단체대표인 김장환(73ㆍ전 연세대 화학과 교수) 회장은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45년 우표 수집을 시작한 원로 필라텔리스트.

"몇 장이나 모으셨냐"고 묻자 그는 대뜸 "그건 초등학생끼리나 묻는 질문"이라며 면박을 줬다. 마니아에겐 수량이나 가격이 아니라 장르와 테마를 먼저 묻는 게 예의라는 것이다. 다시 고쳐 물었더니 화학이나 대학 관련 우표, 그리고 우표 자체를 기념하는 우표를 모은다고 말했다.

우표의 다양한 가치를 설명하며 그는 "각국 화학자들의 얼굴이 담긴 우표를 대학 화학사 강의 교재로 쓴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국내ㆍ외의 저명 우취인들을 열거했다. "정치학을 전공한 연세대 신명순 부총장의 필드는 민주정체, 제3세계 정치인 등인데 그이도 수업 때 우표를 부교재로 더러 썼어요.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익철(베네딕토 최) 신부는 <우표로 보는 구세사> 라는 책도 썼고…." 정보통신부를 오래 출입한 경향신문 출판국 이종탁 기획위원은 우정(郵政), 우표 등과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묶어 최근 출간한 책 <우체국 이야기> 에 미국의 저명 필라텔리스트였던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의 한 마디 _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다_ 를 인용하기도 했다.

우표디자이너 노정화(38)씨는 "우표를 추억이나 향수의 오브제처럼 소개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우리에게 우표는 언제나 새로운 실험과 창조적 도전의 대상이자 성과예요." 향기 나는 우표, 보는 각도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는 시변각 우표도 그들이 최근 선뵌 작품들이다.

독도 관련 우표처럼 디자인 도안을 조폐공사로 넘겨놓고도 외교상황 때문에 발행이 취소돼 사장되는 경우도 있고,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처럼 거의 당일에 디자인을 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많고 애환도 있다. 그래도 그는 그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우표는 나라의 정서와 문화, 역사를 담는 나라의 얼굴이잖아요. 국가가 존속하는 한 우표는 영원할 것이고, 그 영원한 상징 속에 저도 담기는 것이니 영광스럽죠."

그래도 우취 인구의 노령화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이제 성년이 된 대다수 유년의 수집가들에게 우표는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추억의 오브제이기 쉽다.

김장환 회장은 "국내 최고(最古) 우취동호회가 '대한우표회'인데 올해로 출범 60주년을 맞습니다. 출범 초기엔 청소년이 주력 세대였는데 지금은 고교생도 한 명도 없어요." 그나마 최근 출범한 온라인 동호회 '한국 인터넷 우취회'의 회장이 20대라며 그는 반가워했다.

대한우표회는 오는 10월 말 가을이 가장 깊어지는 며칠을 잡아 국립중앙우체국 로비에서 60주년 기념 우표전시회를 여는데, 그 자리에 한국인터넷우취회를 초대하기로 했다. 두 세대의 시간 거리를 뛰어넘는 소통의 자리를 우표가 주선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우표를 국가의 얼굴이라고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소통의 얼굴이다.

세계 최초의 우표가 1840년 영국 왕실이 발행한 '페니 블랙'이니, 우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대한제국 우정총국이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액면금액이 당시 화폐단위인 '문'으로 표시된 우표)를 발행한 것은 1884년이다(갑신정변으로 불과 18일간 쓰이고 사장된 비운의 우표다).

마패나 봉화가 그러했듯, 우표라는 소통의 얼굴도 늙고 잊히고 사라질 수 있다. 그 때 우표는 추억도 아닌 역사의 오브제가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우리 시대의 소통의 얼굴이 바뀌어가는 역사의 순간을 경험하는 중인지 모른다.

천양희 시인은 저 시에서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못한 자의 안타까움과 슬픔을 이야기했다.

'…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자는 이야기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사진=김주성기자 poe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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