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근처에 자리잡은 어느 조각가의 작업실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초로의 작가가 말년의 창작 활동을 위해 준비한 작업실은 웬만한 미술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동안 만들어 온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열어둔 대문으로 지나가던 행인들이 미술관인 줄 알고 스스럼없이 들어서서 작품을 감상한다. 한창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작업실 옆으로 고추와 가지들이 자라고 놀란 개구리들은 부지런히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도시에 살다 보면 어느 틈에 내가 없어진다"는 회고처럼 작가는 늘 도시를 떠나고 싶어 했다. 이제 자연으로 돌아와 흙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찾고 있는 모습이 농부처럼 건강해 보인다.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서 그런지 식물들이 잘 자라지 않는다"고 푸념하면서도 부실하게 자라는 푸른 것들이 서투른 농부에게는 마냥 대견스러운 듯 했다.
그늘에 앉아 차를 마실 때 작가가 테이블 위의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자신의 삶과 예술을 되돌아보며 미처 조각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단상들을 수필로 정리한 것이라고 했다. '환영'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작가는 "지내고 보니 모든 삶과 예술이 다 환영"이라고 했다.
작가의 언급처럼 예술은 사실 환영이다. 조각도 그 탄생부터가 환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해 그 환영을 손으로 움켜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는 나르시스는 환영을 실체로 확인하려는 조각 예술의 탄생 비밀을 들려준다.
조각가들은 이 촉감의 욕망에 사로잡힌 나르시스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었다. 신화에 의하면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이 이 불가능한 일을 실현시켰다고 한다.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는 자신이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여인상을 사랑하게 되자 신에게 그 조각을 실제의 여인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신은 그 조각가의 간청을 받아들여 피가 도는 여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조각의 역사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작가는 피그말리온이었는데, 이후로는 아무도 그처럼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가들은 이 불가능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아니, 이러한 욕망이 없다면 조각 예술은 아예 있을 수 없다. 조각이란 애초부터 '살아 있는 돌'을 꿈꾸는 불가능한 욕망에서 생겨난 까닭이다.
조각가들은 작품이 완성되어 갈수록 조바심을 낸다. 자신의 작품이 피그말리온의 여인처럼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 도나텔로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 작품 <주코네> 가 살아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노에 찬 도나텔로는 <주코네> 를 향하여 "말을 해라, 말을 해"하며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부었다고 미술사가들은 적고 있다. 조각가들이라면 젊은 시절 한 번쯤 자신의 석상을 향해 도나텔로처럼 소리를 질렀을 법하다.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무모함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말이다. 주코네> 주코네>
'살아 있는 돌'을 꿈꾸던 조각가도 세월이 흐르면서 그 격정을 다스리고 조급함을 순화시키는 여유를 얻는다. 한 초로의 작가가 "겁 없이 달려가는 젊은이들의 세찬 물살을 흘려 보내며 잔류로 남아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는 오랜 시간을 조각가로 살아온 관록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일 게다. 이렇게 푸르른 자연에 깃들어 텃밭에 씨 뿌리고 농사 지으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가다듬고 있는 모습이 평온하다. 작가들이 종국에는 자연으로 귀의하고 자연에 순응하고자 하는 뜻을 조금은 헤아릴 것 같다.
전강옥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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