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머물고 있는 한 남자와 현재를 살아가는 한 여자가 휴대폰으로 100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넘어 서로 소통하며 애틋한 사랑을 키운다. 17일 개봉하는 일본영화 '미래를 걷는 소녀'가 품은 내용이다. 보름달이 구름을 뚫고 나와야만 통화가 된다는 등, 과학적으로는 불가해한 여러 요소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더욱 자아낸다. 그러나, 이미 9년 전 엇비슷한 소재의 '동감'(2000)에 눈물을 쏟았던 한국 관객들이 마음을 열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도, 아무리 '동감'을 마르고 닳도록 본 팬일지라도 눈이 번쩍 뜨일 장면이 '미래를 걷는 소녀'엔 담겨있다. 두 남녀 주인공이 도쿄 히비야공원의 유서깊은 레스토랑 마츠모토로에서 '따로, 함께' 카레라이스를 먹는 모습이다. "70전에 먹고 있다" "나는 700엔" "그럼 자동차 값인데…" "과거로 가 용돈을 다 쓰고 싶다" 등으로 이어지는 휴대폰 통화는 물리적 시간을 극복한 젊은 사랑의 발랄함을 도드라지게 한다.
100년 넘는 음식점이나 점포가 허다한 일본을 배경으로 했으니 가능한 설정이다. 모든 게 빠르게 바뀌고, 변하는 게 능사인 우리나라에서는 언감생심일 따름이다.
노포(老鋪)가 수두룩한 일본 문화의 일면을 스크린으로 보고 있자니 일본의 대표적 영화사 쇼치쿠가 문득 떠올랐다. 쇼치쿠는 1895년 가부키 극단으로 출발해 교토의 한 극장에서 과자를 파는 등 사업을 다각화하다 1920년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의 과거에 빗대 과장되게 표현하면 극장에서 오징어, 땅콩을 팔다가 영화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쇼치쿠는 일본영화 사상 최초로 여장 남자배우를 퇴출시켰고,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을 도입했다. 교토에 세워진 가마타 스튜디오는 오래도록 열도 영화의 심장이었다. 세계 영화인들이 경의를 표하는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 기노시타 게이스케, 나루세 미키오 등이 예술적 둥지로 삼았던 곳이 쇼치쿠다. 영화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 헌신이 녹아든 노래 '가마타 행진곡'과 동명의 소설은 쇼치쿠가 낳은 부산물이었다. 쇼치쿠는 4,000여편의 영화를 세상에 보내며 그 스스로가 창작의 소재가 된 것이다. 100년은커녕 왕성한 생산력을 자랑하는 10년 된 영화제작사도 흔치않은 충무로의 현실에선 그저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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