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중국 하얼빈을 다녀왔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하얼빈역으로 가 보았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기억하자는 청계천의 조그만 동판 같은 것이라도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안 의사가 총을 쏜 자리와 이토가 쓰러진 자리에 각각 삼각형과 사각형 무늬가 든 보도블록 두 개만 깔려 있었다. 3년 전 현지에서 기념사업을 벌이며 표지석도 만들 계획이었으나 거절 당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 핵실험으로 북중관계가 미묘해졌기 때문이라 했다. 의아해 하자 "안 의사가 북한 출신(황해도 해주)이어서"라고 귀띔했다.
▦하얼빈에 있었던 안 의사의 동상이 1일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이 동상은 2006년 1월 16일 하얼빈 중심지 유로백화점 옆에 세워졌다. 백화점 이진학 사장이 한국 인사와 중국 교수 등의 고증과 자문을 얻어 자비로 만들었다. 한국 언론에 보도된 직후 베이징에서 관심(?)을 표명했다. 3~4일 후부터 철거하라는 압력이 거셌다. 하얼빈 당국은 "서울 명동에 마오쩌둥 동상을 세울 수 있느냐"고 했다. 1909년 당시 안 의사의 하얼빈 체류기간과 똑 같은 11일 동안 버티다 26일 결국 철거했다. 백화점 지하에 보관했다가 지난달 광복절에 꺼내 서울로 옮기기 시작했다.
▦높이 3m 무게 1.5톤의 동상을 들여오자면 당국 협조가 있어야 했을 터. 인천항에선 육군 군악대의 연주와 꽃다발 증정 등 공식 행사가 성대히 열렸다. 그러나 동상이 서울로 들어오자 문제가 불거졌다.'귀국'을 주도한 안중근평화재단 은 효창공원 안 의사 가묘 근처에 자리잡을 예정이라고 밝혔으나, 행정기관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며 효창공원 사용을 불허했다. 국가보훈처는 얼굴 모습이 실제와 달라 공공장소 설치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동상은 4일 국회에서 간이 제막식을 거쳐 헌정기념관 앞 잔디밭에 받침대도 없이 맨땅에서 노숙하고 있다.
▦그 날 아침 안 의사는 러시아어로 "꼬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러시아군에 검거돼 역무실로 끌려갔다. 러시아 측의 조사는 다소 우호적이었으나 그 날 밤 일본 총영사관 지하감옥으로 인계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거사 이후엔 일러관계, 현장 표지석 세우는 데는 북중관계가 영향을 미쳤다. 시신을 찾고 재판기록을 추적하는 데는 한일관계가 문제다. 동상 하나 제대로 세우자는데 이젠 국내 여러 단체의 눈치를 살펴야 되나 보다. 거사 100주년인 내달 26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동상 문제만큼은 그의 유지에 합당하도록 대승적으로 결정하자.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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