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수몰된다고? 정말이야?"
지난달 25일 밤 서울 종로구 보신각 뒷골목. 식당과 술집으로 향하는 흥성스러운 퇴근 인파 속에서 하이 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걸음을 멈춘 채 담벼락에 포스터를 붙이는 일군의 젊은이들을 둘러싼 사람들 표정엔 물음표가 둥실 떠있다. 포스터는 '알림. 이곳은 수몰예정지역입니다'라는 카피 한 줄이 전부.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서울 시내 한복판을 수몰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는 재능기부 모임 '메시지(Message)'의 티저 광고다.
기부 하면 흔히 돈부터 생각하지만, 최근 들어 돈 대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나누는 '재능기부'가 기부 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로 각광받고 있다. 자신이 잘 하는 일을 통해 사회환원을 실천함으로써 기존의 일률적이던 자원봉사의 영역과 방식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2004년 결성된 '메시지'는 대중들을 상대로 공익적인 사고와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광고 만드는 재능을 택했다. 광고와 홍보가 기업의 이윤 창출이라는 상업적 목적 외에 공익적인 가치 실현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자는 게 이들의 결사 동기다.
"재능기부는 돈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서 효과를 발휘하죠.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거나 소아암 환자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는 건 돈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회원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이날 모인 회원만 봐도 모임을 만든 하용만(31)씨는 광고기획사 코래콤의 광고기획자(AE), 이혜은(21) 김수진(22) 동원혁(27)씨는 남서울대에서 광고홍보를 전공하는 학생, 황선희(29) 양희선(27)씨는 여론조사기관 월드리서치 연구원이다.
공익 광고라고 해서 구태의연한 캠페인을 떠올리면 오산이다. 자비를 들여 만드는 만큼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하긴 어렵지만, 시대의 키워드 '크리에이티브'를 구현하기 위해 기획에서 집행까지 광고 한 편에 평균 10개월을 투입한다. 2007년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서울 강남의 가로수 100그루에 파인애플과 바나나를 매달고 'Made by CO2'(이산화탄소로 만들어짐)라는 패널을 붙인 '가로수 캠페인'은 큰 반향을 일으켜 환경부와의 공동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길바닥에 하얀 스프레이로 교통사고 당한 펭귄 사체 모양을 그려 온실가스 배출 주범인 자동차로 인해 북극 펭귄이 멸종 위기에 처했음을 알린 '펭귄 프로젝트'도 눈길을 모았다.
"우리나라 공익광고는 주체가 코바코(한국방송광고공사)라 국가의 정책 홍보나 국익이라는 틀 안에서 주제가 선정돼요. 그러다 보니 크리에이티브하지 않고, 순수하게 공익적이지도 않죠. 민간기업은 죄다 상업적 목적으로 공익광고를 만들고요." 하용만씨는 "크리에이티브 한 공익광고 만드는 일이 처음엔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호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메시지 회원은 200여명으로, 프로젝트마다 심사를 거쳐 10명 가량을 뽑아 투입한다. 뜻이 좋아 뭉쳤지만 한 달에 1~3회씩 모여 회의하고 보고서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침 6시까지 밤 새워 보고서 만들고 출근한 적도 여러 번이고, 한밤중 나무에 올라가 파인애플을 달다가 낙상하기도 했다. 강남에선 "집값 떨어지게 무슨 짓이냐"는 주민들 타박을 들어야 했다.
제 앞길 닦기에도 바쁜 젊은이들이 왜 이런 고난을 자처하는 걸까. "왜냐고 물으면 즐거워서라고밖에 할 말이 없어요. 자기만족과 보람이죠. 또 전 세계인의 숙제이기도 하고요. 이왕이면 선봉에 서서 이끌어가면 좋지 않을까요?"(양희선씨)
이들에게 행복은 성공으로 포장되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순간순간 느끼고 확인해야 하는 미시적 가치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 지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묻게 된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우리가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으면 그만이죠. 재미있고 유쾌하게 사람들의 인식을 바꿈으로써 우린 엄청난 행복을 느껴요."(하용만씨)
황선희씨는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욕구를 분출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며 "다들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이런 방식의 기부도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훨씬 많은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재능기부를 실천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재능기부 백인백색
"사진 찍는 제 능력을 그저 나누고 싶을 뿐이죠."
3년째 재능기부 활동을 펼치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이요셉(32)씨는 지난 7월 한 달간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차드의 빈곤 마을을 다녀왔다. 우물 하나 없어 아이들이 수인성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곳, 다 해진 옷을 걸치고 쓰레기를 뭉쳐 만든 공을 차는 아이들…. 그가 카메라에 담아온 현지 모습은 구호단체 홍보물과 인터넷 등에 실려 천마디 말보다 더 절실하게 도움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다.
이씨는 "저한테 카메라가 있듯이, 회계사나 경비원, 우산 고치는 아저씨도 다 각자 가진 재능이 있고, 그걸 나누는 게 바로 기부"라고 말했다.
블로거 류장성(31)씨는 글쓰기 능력을 나눈다. 병원 홍보팀에서 일하는 그는 의학 블로그 운영경험을 살려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 사연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지난 5월 '총각인데 벌써 딸이 생겼습니다'라는 글로 시작한 사연 소개는 네티즌 수백명의 기부로 이어졌다.
그는 "디지털 활용 능력이 높아지자 아날로그적 감성도 살아나 나눔을 실천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의 슈바이처, 바보 의사로 불렸던 장기려 박사님을 존경해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았던 박사님의 뜻을 닮아 감히 e세상의 장기려 박사가 되고 싶습니다."
캐리커처 작가 동호회 '캐리아트'회원들은 구호단체가 주최한 마라톤 대회에 참여해 캐리커처를 그려주고 모금한 돈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후원자가 해외 결연아동에게 보내는 편지를 번역해주는 언어 나눔, 행사에 사용될 노래를 작곡해 주거나 목소리로 참여하는 소리 나눔, 의학, 법률 등 전문 지식을 나누는 지식 나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나눔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강희경기자 kbstar@hk.co.kr
■ 20, 30대 신청자 1년새 155% 급증
재능기부는 기부를 흔히 비범한 사람들이 큰 돈을 내놓는 것으로 여기는 통념을 깬다. 개인이나 기업이 가진 지식과 기술, 나아가 목소리 같은 자원까지도 모두 기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기부라는 말이 다소 무겁다면 '능력나눔'이란 표현은 어떨까. 그 취지가 한층 선명하게 드러난다.
7일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에 따르면 올들어 이날까지 홈페이지 '능력나눔 뱅크' 게시판을 통해 재능기부를 신청한 사람은 1,180명으로 2006년(189명)의 6배를 웃돈다. 지난해(628명)와 비교해도 2배 가까이 된다. 4년간 총 신청자의 88%(2,185명)가 20,30대인데, 특히 올해 9개월 남짓한 기간 신청자가 1,132명으로 지난해 전체와 비교해 155% 급증했다.
2030 세대가 재능기부에 몰리는 것은 '누구나' '무엇이든'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니라 여겼던 자신의 다양한 능력을 활용해서 어려운 이웃에게 작지만 꼭 필요한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점에서 금전적 기부보다 더 큰 보람을 얻는 것이다. 구호단체의 소프트웨어 개발을 돕는 프로그래머 윤승민(31)씨는 "일에만 매달려 살다 봉사에 눈을 돌렸는데 막상 어떻게 할지 몰랐다"며 "늘 해오던 일로 비영리단체를 도울 수 있어 정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재능기부는 복지기관 방문이나 고된 노력봉사에 국한됐던 자원봉사의 지평을 넓히는데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굿네이버스 유혜선 홍보부장은 "재능기부가 자원봉사를 어렵게만 생각했던 사람들이 봉사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벽을 허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수적인 효과이지만, 재능기부는 기부하는 사람에겐 좋은 일 하면서 해당 분야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구호단체 등에선 이들의 도움으로 행정적 비용을 줄여 더 많은 자원을 이웃돕기에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윈윈'의 봉사라고 할 수 있다.
강희경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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