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나이가 있지만, 시에는 나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등단 40년에 대한 개인적인 감회보다는 굴곡 많았던 역사를 시인으로서 겪고 '살아냈다'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솔직하고 활달한 언어로 여성의 주체적 삶에 대한 갈망을 노래해온 문정희(62) 시인. 등단
40년을 맞아 130여편의 시를 추린 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 (뿔 발행)를 낸 그는 "늘 새로운 감각을 찾으려 하고 끼도 넘친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자리에 앉게 해주고 나를 지켜준 것은 시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지금>
그가 정식 등단한 것은 대학 4학년 때인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다. 하지만 그는 이미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진명여고 3학년 때 시집 <꽃숨> 을 내기도 했던 유명한 '문학소녀'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1970년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하고, 교육받은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강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때였다. 그는 늘 그 앞자리에 서 있었다. 꽃숨>
"한국 여성들에게는 1970년대가 한 에포크라고 생각한다"고 돌아보는 문씨의 당시 시들에는 여성을 금압하던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저항의 언어들이 펄떡거리고 있다. '나는 밤이면 몸뚱이만 남지// 시아비는 내 손을 잘라가고/ 시어미는 내 눈을 도려가고/ 시누이는 내 말(言)을 뺏아가고/ 남편은 내 날개를/ 그리고 또 누군가 내 머리를 가지고 달아나서/ 하나씩 더 붙이고 유령이 되지….'('유령'∙1973) 결혼과 함께 자기정체성을 부정당하는 여성들의 삶의 조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여성의 현실은 그를 시에 매이도록 한 원천이었다.
생명 탄생의 찰나를 포착한 '꽃 한송이'와 더불어, 그의 시 가운데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1997) 역시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내 시의 원천은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해요. 큰 틀에서 보면 나의 생명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자유의식의 발로가 이런 페미니즘 시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존재의 자유로움에 대한 시인의 갈망은 페미니즘 시로 꽃피기도 했지만 '마감뉴스'(1995)나 '딸아, 미안하다'(2004) 처럼 정치∙사회적 정의가 부재했던 우리 현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화하기도 했다. "투옥되는 등 현장에 있던 시인들에 대해 늘 부채감이 있지요. 그래도 비록 현장에서 구둣발 세례를 받고 뺨을 얻어맞지는 않았지만 제 나름대로 저항했다고 생각해요. 권력 쪽에 서지 않고 늘 시 쪽에 서 있었다는 것이 제 자부심입니다."
고교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1970년대 중반에는 연극배우로 나섰으며, 80년대초에는 불현듯 미국 뉴욕으로 떠나 종교교육학과 예술고고학을 공부했고, 90년대 초에는 소설을 쓰기도 하는 등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끼'에도 불구하고 그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은 시. 그에게 시란 무엇일까? "조숙했는지 어린 시절부터 삶이 지루하고 덧없다고 느꼈어요. 오로지 시만이 싫증이 나지 않았지요. 역설적으로 말해 시 앞에서 저는 늘 '미숙아' 이고 '처녀' 였어요. 시는 저를 늘 절벽 끝에 서있게 했지요."
동국대, 고려대 교수 직을 그만두고 올해 '전업 시인'이 된 문씨는 "이번 시집은 40년을 의미해 나왔지만 아직 내게는 무의미한 것 같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것같다"고 말했다.
이왕구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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