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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30> 클라라 체트킨 - 공산주의자의 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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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30> 클라라 체트킨 - 공산주의자의 기품

입력
2009.09.06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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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여자를 만나기 전에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역사를 흘끗 살피자. 지금 독일 양대 정당 가운데 하나인 SPD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전까지 유럽사회주의를 선두에서 이끈 바 있다.

당대 가장 뛰어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비(非)마르크스적 사회주의자들, 노동운동가들이 이 당에서 협력하고 경쟁하고 싸우며 유럽사회주의 역사의 큰 줄기를 만들어냈다.

SPD의 역사를 살핀다는 것은 SPD 구성원들의 '이합집산'을 살핀다는 뜻이다. 자세히 살피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겠지만, 그 뼈대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를테면 현재 우리 민주당의 뿌리는 해방기의 친일 지주 자본가 정당이었던 한민당인데, 한민당에서 민주당까지 60여년 역사보다, 독일사회사민당의 한 세기 반 역사가 한결 깔끔하고 간단하다.

그것은 SPD 역사의 이합집산이 주로 이념에 기반을 둔 데 견주어, 한민당에서 민주당까지의 이합집산이 주로 사적 연줄과 관련돼 있다는 점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1863년 5월23일 노동운동가 페르디난트 라살은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동맹(ADVA)이라는 정치적 노동운동단체를 만들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협력자였던 라살의 ADVA는 제2제국(통일독일)이 성립되기 전 프로이센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노동자 정당이었다.

그보다 여섯 해 뒤인 1869년 8월에는, 역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을 중심으로 아이제나흐에서 독일사회민주노동당(SDAP)이 출범했다.

소위 '독일문제'(ADVA는 소독일주의를, SDAP는 대독일주의를 주장했다)를 제외하고는 이념과 구성원이 일부 겹쳤던 이 두 좌파 정당은 제2제국의 출범으로 이 문제가 해소되자, 1875년 합당해서 독일사회주의노동당(SAPD)을 탄생시켰다.

SAPD는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탄압법으로 고생하다가, 이 법이 폐지된 1890년 당명을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독일사회민주당(SPDㆍ앞으로 '사민당'으로 부르자)으로 고쳤다.

사민당은 본디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 출범했으나, 이내 베른슈타인 등의 수정주의가 침투한 잡탕정당이 되었다. 당원들 사이의 이념 차이를 확연히 드러낸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유럽 각국의 좌파 정당들은 '인터내셔널리즘(국제주의)'의 이상을 배반하고 거의 다 애국주의당이 되었다. 독일사민당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정부가 제안한 이른바 '성내(城內) 평화'(Burgfriedenㆍ전쟁기간 중에는 파업을 하지 않겠다는 정부와의 약속)를 받아들인 사민당 다수파(Mehrheits-SPD)에 반대해서, 소수파 평화주의자들은 독일독립사회민주당(USPD)을 만드는 한편 사민당 내에 사회민주노동그룹(SAG)을 조직해 정부의 전쟁예산 확대를 방해했다.

USPD의 더 급진적 일파는 스파르타쿠스동맹을 만들었고, 이 조직은 종전 직후인 1918년 독일 11월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이듬해 독일공산당(KPD)으로 발전했다. 그러니까 독일사민당과 독일공산당은 본디 한 뿌리였던 셈이다. 당내 급진파를 내친 사민당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군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과 함께 주류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제 오늘의 여자 클라라 체트킨(1857~1933)을 만나보자. 더 이상의 당사(黨史)를 일별하는 일이 불필요한 것은 체트킨이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당이 독일공산당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클라라 체트킨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첫 여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보다 덜 알려져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워낙 뛰어난 경제학자였던 데다가 스파르타쿠스동맹 봉기 때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클라라 체트킨이 사회주의 운동에, 특히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끼친 공로는 로자 룩셈부르크에 뒤지지 않는다. 클라라는 로자보다 열세 살 손위였다. 그리고 그 둘은 절친했다. 이념적으로도 그랬고, 사적 관계로도 그랬다. 사민당 이래 공산당 창당까지 당내 좌파 지도자들 가운데 여자는 이 두 사람밖에 없었으니 그들의 친교가 당연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처럼 클라라 체트킨도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교사로 교육받았고, 교사가 되었다. 폴란드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해 독일 사민당 한 가운데로 뛰어든 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외국인'이 아니었던 클라라 체트킨은 조국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부터 독일 여성운동계, 노동운동계와 연계를 맺었던 클라라는 1878년(폴란드의 로자가 여덟 살 때다) 독일사회주의노동당(SAPD)에 가입하면서 정치에 뛰어들었다. 앞에서 얘기했듯, SAPD는 독일사민당(SPD)의 전신이다.

클라라는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탄압으로 파리에서 10년 가까이 망명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 동안 민중에 대한, 특히 여성 민중에 대한 그녀의 연대감은 한결 굳건해졌다. 독일사민당으로 이름을 바꾼 자신의 당으로 돌아온 뒤, 그녀의 정치활동은 본격화했다. 그 뒤 그녀의 정치행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_그리고 카를 리프크네히트와_한 치의 다름도 없었다. 말하자면 클라라 체트킨은 좌파의 좌파였다.

그녀는 전쟁이 터지자 갑자기 애국자로 변해버린 사민당 동료들에 맞서 USPD를 건설했고, 그 내부의 좌파라 할 스파르타쿠스동맹을 조직했으며, 평화주의 노선 때문에 감옥엘 들락거렸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동맹 봉기 와중에 옛 동료들(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포함한 참전파)이 참혹하게 살해한 좌익 동료들을 대신해 독일공산당을 이끌었다. 군부와 손을 맞잡은 사민당 주류에게 클라라가 살해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운이 좋았던 덕이었다. 그녀는 마침 베를린이 아니라 슈투트가르트에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역량이 조직의 성격과 힘을 완전히 결정할 수야 없겠지만, 로자 룩셈부르크도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없는 독일 공산당에 클라라 체트킨마저 없었다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공산당의 활동은 한결 굼떴을 것이다.

전문적 경제학 지식에서 클라라가 로자에 못 미쳤다면, 관심과 활동의 다양성에선 로자가 클라라에 못 미쳤다. 문필활동에서 클라라가 로자에 못 미쳤다면, 대중 연설을 통한 선동에선 로자가 클라라에 못 미쳤다. 클라라의 유명한 반전 연설 한 편은 이렇게 요약된다. "여러분의 남편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아들들은 어디 있습니까? 이 전쟁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자본가일 뿐입니다. 노동자들은 이 전쟁에서 잃을 것만 있을 뿐 얻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살인은 그만둡시다!"

운동 초기부터 클라라는 여성운동이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중요한 부분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수많은 연설을 통해서 부르주아 여성의 적은 남성이지만,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적은 남성 자본가라고 강조했다. 그것이 특별한 관점은 아닐지라도, 클라라는 여성운동에 계급성을 버무린 초기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사민당의 여성신문 <평등> (Gleichheit)을 창간해 편집장이 되었고, 사민당 내에 '여성국'을 만들어 남성지배적인 정당 지도부에 여성운동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의 노동여성회의에서 클라라는 매년 3월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해 기념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다음해부터 시행되었고,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레닌의 도움을 받아 전세계로 퍼졌다. 체트킨이 3월8일을 제안한 것은 1857년과 1908년 3월8일, 미국 여성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에 항의하는 대규모 파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 날은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극소수 국가에서 공산당이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념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절친했던 동료들이 러시아혁명 직후 살해된 탓에, 클라라는 독일공산당만이 아니라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일까지 챙겨야 했다. 그래서 1920년대 이후 그녀의 동선은 베를린과 모스크바를 오갔다. 클라라는 1921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멤버였고, 1925년에는 적색 원조(Rote Hilfe)라는 국제 좌익연대 단체의 회장으로 뽑혔다.

클라라 체트킨 인생의 정점은 작고하기 한 해 전인 1932년 8월30일, 독일연방의회 개원일에 개원사를 한 일일 것이다. 그녀가 이 연설을 맡게 된 것은 최고령자가 명예의장으로서 개원사를 하는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연방의회의 제1당인 나치당 의원들로 그득 찬 의사당에서, 이 늙은 공산주의자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치즘과 싸우자고 외쳤다. 그 연설의 마지막은 이랬다. "언젠가 소비에트 독일의 첫 소비에트 의회 명예의장으로서 오늘처럼 개회사를 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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