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고향의 어르신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한잠도 자지 못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니, 그리고 50여년 만에 나를 만나겠다니….
나는 서둘러 이런 저런 준비물을 챙겨 나의 고향인 충북 두메 산골 단양으로 출발했다. 단양으로 가는 길에 나는 당황스러웠고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가 아주 어릴 적에 집을 나가셨다. 어머니는 18세에 아버지와 결혼을 하시고, 이듬해에 나를 낳았고, 그 이후 밑으로 여동생 둘을 낳았다. 그리고 24세에 우리를 두고 집을 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집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원주로 오게 되었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 외가와는 소식을 끊고 지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외가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 빛이 변하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원주에서 우리를 돌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원주에서 아주 유명한 조직 폭력배의 행동대장이었다. 아주 무서웠고 잔인했다. 피를 흘리며 시내를 사납게 다니는 것은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사회 생활보다는 교도소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외가 식구와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서워 우리를 보러 오지도, 찾지도 못했다. 우리는 아버지가 무서워 겨울에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짚더미를 이불 삼아 잠을 청하곤 했다. 막내 여동생은 이런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 삼남매는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살았다. 아니 철저히 잊고 지냈다. 어머니는 고향 사람을 통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당신의 여동생(나의 이모)과 고향 근처에 장례식에 오셨다가 우리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단양의 작은 다방에서 나는 어머님을 만났다.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평범한 작은 70대의 시골 노인이 나의 어머니라니….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내 가슴에 그리움이 사무쳤다. 왈칵 눈물이 나왔다.
어ㆍ 머ㆍ니….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집에서 나간 후 남쪽의 어느 시골에서 재가를 했다. 자식이 셋이 있다는 것을 감추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생각하면서 재가를 하고 나서 자식을 낳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버지로 인해 말 못할 고생을 하고 있을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혔다고 했다. 자신이 이 먼 곳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에 한이 맺혔다고도 했다.
어머니는 남의 집 품팔이도 하고,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자식을 만날 생각을 저축을 했다고 한다. 남편 몰래 조금씩 돈을 떼어 땅에 묻었다고 한다.
무려 40년 동안 우리를 생각하며 이런 식으로 돈을 모았다는 것이다.
우리를 만날 수 있다고 해서 묻어둔 돈을 꺼내보니 곰팡이 투성이였단다. 그렇게 모은 돈이 1,800만원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이 금액을 내 앞에 내놓으셨다.
"아들아, 이 돈이 내 평생 너희를 위해 모은 돈이다. 그 동안 어린 너희들을 찾지 못한 이 어미를 용서해주겠냐? 이세상이 내 것이라면 다 네게 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제야 내 마음의 멍에를 벗는 느낌이다."
어머니는 말씀을 이어갔다.
"너희들이 앞으로 이 에미를 찾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찾으면 지금 잘 살고 있는 가정이 망가진다."
그러나 나는 눈치를 챘다. 자녀도 없이 아주 늙은 남편과 살아가면서 무슨 가정이 망가질 것인가. 어머니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다.
어머님은 우리를 만나는 내내 차분했다. 그렇게 어머니와의 두 시간이 훌쩍 흘렀다.
나는 어머니의 주소도, 전화번호도 묻지 못했다. 막 헤어지려는 순간 어머니는 잠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는 법 없이 냉정하게 길을 떠났다.
나는 차마 그렇게 나가시는 어머님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머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내 손에는 어머님이 전해준 1,800만원이 들어있는 쇼핑백 뿐이었다.
우리 남매는 어머니를 잊고 살았어도, 어머니는 우리를 한 시도 잊지 못했다. 어머니는 무거운 멍에를 벗어버리고 편하게 지내실까? 남쪽하늘이 유난히 가까워 보인다. 어머니의 오 십년 한 평생의 사랑에 온몸에 전해온다.
어머니, 건강하세요. 어ㆍ머ㆍ니….
강원 원주시 명륜2동 - 황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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