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모인들 남에게 빠지리
바느질 길쌈도 잘하는데
어려서 가난한 집에서 자라
중매쟁이도 알아주지 않아요
밤 깊도록 쉬지 않고 길쌈하니
삐걱삐걱 베틀 소리 차게 울리네
베틀 속에 한 필 비단 감겨졌으니
어느 누구의 옷으로 짓게 될까요
쉬지 않고 손으로 가위질하니
추운 밤 열 손가락 시려 오네요
남을 위해 시집갈 옷 짓지만
나는 해마다 홀로 잡니다
● 소설가 김미월씨가 쓴 허난설헌 (1563~1589)에 대한 에세이를 읽다가 이 시를 발견했다. 시는 '허난설헌 평전'을 쓴 장정룡씨의 글에서 인용했다. 절절한 것은 중세의 한 시절을 살았던 가난한 처녀의 밤이 현대를 살아가는 가난한 처녀의 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 정치, 문화가 글로벌화된 것처럼 가난도 글로벌화된 시대에 사는 우리. 이 시를 읽으며 우리보다 더 가난한 나라에서 우리를 위해 적은 임금을 받으며 재봉틀에 앉아 옷을 짓는 남의 나라 처녀들이 떠오른다.
조선시대에 여자로 태어나 원만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했고 딸과 아들을 잃었으며 동생 허균의 귀양살이까지 목격했던 그는 27세에 홀연히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매쟁이도 몰라주고 남을 위하여 옷을 짓던 중세의 한 여자를 위한 시.
그 여자의 얼굴을 그려보려고 나는 애를 쓴다. 가난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타인을 위하여 혼수옷을 짓는 여자. 그 여자의 애잔한 얼굴과 목굽이에 드리워진 가난의 한기. 이 처녀를 위한 노래를 후세에 남긴 허난설헌의 얼굴에 처녀의 얼굴이 겹쳐진다. 가난한 이 세상의 많은 처녀들에게 이 노래를 드린다.
허수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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