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나 골프나 공을 강하고 멀리 정확하게 때리는 원리는 똑같아. 힘을 빼고 스윙궤도에 따라 빠르게 휘두르면 돼!"
늦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던 2일 고양 중산힐스 골프연습장. 왕년에 홈런타자로 이름을 드날렸던 김우열(61)은 골프 강사로 변신해 열변을 토했다. 주말엔 양평 비둘기 리틀야구단을 운영하는 김우열은 평일엔 무보수로 미래의 골프황제, 골프여왕을 양성한다.
명장 밑에 약졸이 없다고 했던가. 홈런왕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 신다빈(16ㆍ보영여고)은 300야드에 육박하는 드라이버 샷을 때려댔다. "두고 보세요. 다빈이가 신지애, 미셸 위를 뛰어넘는 선수가 될 겁니다."
실업야구 최고의 홈런왕
작고 비쩍 마른 체구에 멋들어지게 기른 구레나룻.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홈런타자로 명성을 날리던 때와 달라진 건 없다. 김우열은 30대, 40대 야구팬에게 꿈을 심어줬던 슈퍼스타. 선수 시절 김우열이 거리에 나가면 택시가 서로 태우려고 경쟁했을 정도다.
"33세. 남들은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에 프로야구 무대에 뛰어들었죠. 프로가 몇 년만 빨리 생겼어도 제 실력을 모두 보여주는 건데…. 실업야구에서는 통산 최다 홈런(124개), 최장거리홈런(150m), 최다경기 연속홈런(6경기) 등 각종 홈런 기록을 모두 제가 세웠습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82년 OB(현 두산) 4번 타자였던 김우열은 3할1푼(8위), 홈런 13개(공동 4위)를 때리고 나서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도 홈런포를 가동해 원년 우승의 주역이 됐다. 당시 삼성 포수 이만수(51ㆍSK 수석코치)와 홈에서 충돌하면서 다친 탓에 뛰지 못한 경기가 많아 홈런왕을 놓친 게 천추의 한이다.
노력과 흉내로 일군 성공
김우열이 선린상고 2학년이던 66년 겨울. 선린상고 박종해 감독은 김우열의 아버지에게 "우열이는 체격이 워낙 작아서 야구로 성공할 수 없다"고 충고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제일은행에 입단한 김우열의 체중은 고작 59㎏. 이때까지만 해도 "홈런을 한 개 치면 은퇴한다"고 말할 정도로 장타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동화 선배 집을 오가면서 수비를 배웠고, 재일동포 김동률 선배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타격을 배웠습니다. 나보다 잘하는 선수가 있으면 장점을 흉내 냈고, 쫓아가서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죠." 김동률은 김우열에게 "힘을 빼고 방망이를 휘둘러야 빠르고 강한 타구를 때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았다. "동률이 형이 실업 2년차였던 69년 어느 날 밤 제게 막걸리 한 됫박을 먹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상업은행과 경기가 있는 데 말이죠." 술이 깨지 않아 술 냄새를 풀풀 풍긴 김우열은 상대투수 김윤겸을 상대로 생애 첫 홈런을 때렸다. 이른바 취권 타법으로 만루홈런을 쳐냈다. 힘을 뺀다는 의미를 깨달은 김우열은 이날 이후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홈런타자로 변신했다.
홈런왕 노하우 전하고파
왕년의 홈런왕은 96년 쌍방울 사령탑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났다. 멋지게 활약한 뒤 은퇴하겠다는 선수 시절 목표도 지도자로서도 성공하겠다는 꿈도 사라졌다. 그래선지 일부러 야구를 피했다던 김우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산과 양평 등에 리틀야구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제가 타고난 운동능력은 없었지만 엄청나게 노력한 덕분에 많은 걸 배웠는데 사장시키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 유소년 야구에 뛰어들면서 최연소 여자 국가대표였던 신다빈과 남자 국가대표 이경훈(18ㆍ서울고) 등 골프 꿈나무에게 매달리는 이유다.
"학생야구와 학생골프는 실력과 함께 예의범절을 배워야 하고, 프로야구와 프로골프는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제가 평생을 걸쳐 배우고 깨달은 운동의 원리를 후배들에게 전달하는 게 제가 할 일이죠."
고양=이상준 기자 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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