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을 넘긴 두 여성 연출가는 여전히 세상과 섣불리 화해할 기미가 없다. 김아라(53), 한태숙(59)씨. 각각 극단 무천의 '물의 정거장', 극단 물리의 '도살장의 시간'을 준비하느라 뜨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 무천 '물의 정거장'
"여자의 신체가 땅에 내려지고, 땅에 웅크리는 여자와, 여자를 안는 남자. 젖은 두 사람의 신체가 천천히 섞인다… 남편의 손을 잡아당기는 아내, 잡아당긴 남편의 손으로 신체를 만지는 아내. 가슴, 배, 다리…"
10명의 남녀 배우에게 대본은 세세하게 명령어를 내린다. 철학자이기도 한 일본의 극작가 오타 쇼고(太田省吾)는 인생을 정거장에 머물렀다 가는 여정으로 그린다.
무수하게 꺾이기도, 멍하게 보내기도 하면서 서서히 끝을 향해 가는 삶의 모습을 침묵극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다양한 오브제, 음악, 마임 등 비언어적 요소들이 양말, 자전거, 새장 등 생활의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는 무대를 채운다.
'물의 정거장'은 극단 무천의 식구들을 데리고 13년간 경기 죽산을 거점으로 '햄릿 프로젝트' 등 실험의 칼날을 벼려온 연출가이자 극단 대표인 김아라씨의 회심작이다. 지난 3월 대학로에 마련한 60평짜리의 실험예술 공간 '창작 팩토리 스튜디오 09'이 본격 공연장으로서의 출발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김씨의 정거장 시리즈 1편이다. 12월에 '모래의 정거장', 내년에 '땅의 정거장'까지 올려 정거장 시리즈 3부작을 완결할 예정이다. 29~10월 4일 창작 팩토리 스튜디오 09. 화~금 오후 8시, 토 4시~8시, 월 4시. 070-7501-0001
■ 물리 '도살장의 시간'
"암소의 머리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긴 쇠막대를 넣어 휘젓는다. '기억'을 짓뭉개어 파괴한다. 너의 뇌가 간직했던 시간들을 지운다… 짓뭉개고 으깬다. 기억을, 추억과 역사를, 영혼을 지운다."
한태숙씨가 연출하는 극단 물리의 '도살장의 시간'은 소설가 이승우씨의 단편 '도살장의 책'을 각색한 것이다. 원작이 상징하는 '문학의 위기'는 이 무대에서 '연극의 위기'를 환유한다.
관념 언어와 도살꾼의 욕설이 범벅된 가운데, 연극이 결국은 사멸할지 모른다는 예감은 무대에서 피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공기총에 맞아 구멍 난 소의 머리에 쇠막대기를 집어넣어 휘젓는 백정들의 잔인함은 연극이 죽어가는 이 시대를 보여준다.
제9회 서울공연예술제의 국내 초청 무대로 선정, 의의를 더한다. 10월 27일~11월 8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02)762-0010
모처럼 선보이는 중견 여성 연출가들의 무대가 약속이나 한 듯 격렬하다. 연극평론가 장성희씨는 "20세기 들어 무대 메커니즘이 발달하면서 연극은 연출가의 총체적 무대로 귀결됐다"며 "특히 여성 연출가들은 내면에 잠재하던 미완의 것을 꽃피우고 있다"고 말한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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