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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좋은 세금, 나쁜 세금

입력
2009.08.3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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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년 후당(後唐)을 세운 이존욱(李存勖)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공겸(孔謙)에게 재무를 맡겨 재정 확대에 나섰다. 공겸은 이름처럼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다. 갖가지 명목의 세금을 만들어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 농가에서 사용하는 소금에는 식염세를, 농주를 빚는 데 쓰는 누룩에는 누룩세를 매겼다. 압권은 작서모(雀鼠耗)라는 세금이었다. 공겸은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물과 옷감이 참새나 쥐에게 먹혀 소모되는 양을 계산, 그에 상당하는 분량을 또 거둬들였다. 혹독한 가렴주구 정권이 오래 갈 리 없었다. 후당은 13년 만에 멸망했다.

중세 유럽도 다양한 세금을 양산했다. 영국의 윌리엄3세는 창문 수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창문세를 만들었다. 크고 좋은 집이 창문이 많을 테니, 일종의 재산세인 셈이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창문을 없애고 어두운 생활을 택했다. 제정 러시아시대 표트르 1세는 귀족들이 권위의 상징으로 기르던 구레나룻에 매년 100루블의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자 너도나도 애지중지하던 수염을 깎기 시작했다. 어둠이나 권위 추락보다도 세금이 더 무서웠던 셈이다. 일할 의욕을 빼앗고 반발만 키우는 '나쁜 세금'의 전형들이다.

감세ㆍ증세의 이율배반적 조합

이처럼 세금은 사람들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며칠 전 내놓은 '2009 세제 개편안'도 작서모나 창문세에 비하면 양반이지만, 조세 저항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당장 소득공제 혜택을 노려 장기주택마련저축을 들었던 가입자들은 불복운동을 벌일 태세다. 기존 가입자의 기득권까지 뺏어가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는 주장이다.

가뜩이나 전셋값이 올라 고통이 심한 세입자들도 불만이다. 전세보증금에 대한 과세는 결국 세입자 부담으로 전가될 공산이 큰 탓이다. 주식투자자들도 입이 한 발은 나왔다. 국내 주식형펀드의 절반 이상이 아직 원금 회복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과세가 이뤄지면 수익률이 나빠질 것이라는 지적이다.

정부는 이번 세제 개편의 기본방향을 ▦경기 회복을 위한 감세 기조 유지 ▦고소득자와 대기업에 대한 과세 강화로 재정 건전성 확보 ▦서민ㆍ중산층에 대한 세제지원 확대라고 설명한다. 이미 시행 중인 감세 정책은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혜택이 집중되는 법인세, 소득세 세율 인하가 핵심이다. 한편으론 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세금을 왕창 깎아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재정 건전성 악화를 이유로 이들에게서 세금을 더 걷겠다는 것이다. 감세와 증세가 뒤섞인 조합이다 보니 국민들이 헷갈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정부 논리대로 법인세와 소득세 부담을 덜어주면 투자와 소비가 활성화할지도 의문이다. 2006년 기업들의 평균 실효법인세율(법인세 납부액을 세전 이익으로 나눈 비율)은 미국이 25.1%, 일본은 42.3%인 반면, 우리나라는 20.3%였다. 우리 기업들이 선진국보다 법인세율이 높아서 투자를 못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고소득층은 세금을 깎아줘도 소비를 크게 늘리지 않는다. 소득이 낮을수록 평균 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에 고소득층보다는 중산층 이하의 소득을 높이는 게 전체 소비 증가에 효과적이다. 영국과 미국은 금융위기 이후 고소득층에 대한 소득세율을 4~10%포인트나 높였다.

대규모 감세 유보하는 게 순리

경제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다. 특정 세금의 세율을 크게 떨어뜨려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 그 부담을 대신 떠안아야 한다.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세금을 깎아주면서 서민층에 대한 세제 지원도 병행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부가 재정 위기를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세수 감소의 주범인 법인세와 소득세 인하부터 유보하는 게 맞다.

납세는 국민의 의무다. 자본주의 국가의 세금은 국가 운영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단이자, 소득 재분배 역할도 맡는다. 자산이 많고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세금을 더 내는 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의 재원 조달에 기여하면서 소득 재분배 효과까지 거둘 수 있어야 '좋은 세금'이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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