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9> 윤심덕 - 현해탄에 가라앉은 사랑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9> 윤심덕 - 현해탄에 가라앉은 사랑

입력
2009.08.31 00:59
0 0

유럽 어느 도시에서든 거리의 악사들이 흔히 연주하는 곡이 있다. 루마니아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가 1880년에 만든 왈츠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이다. 한국에는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나우'와 '다뉴브'는 같은 강을 독일어 화자와 영어 화자가 제가끔 부르는 이름이다. 센강 가에서도, 라인강 가에서도 악사들은 도나우강의 잔물결 소리만 들려준다. 한국인들 귀에도 익숙한 선율이다.

피아노 독주용이나 합창용으로도 편곡돼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 곡을 피아노 연주로 들어본 적도 없고, 가사도 들어본 적이 없다. 거리의 악사들이 베푸는 아코디언 선율로만 들어봤을 뿐이다. 요즘은 국내 거리의 악사들도 이 곡을 자주 연주하는 듯하다.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아시아나 아메리카 여러 도시 거리의 악사들도 이 곡을 선호할 것 같다. 혹시 남아메리카에는 그 쪽 민요를 편곡한 곡들이 거리 악사들의 넓은 레퍼토리를 구성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유럽을 대표하는 거리의 노래는 역시 '도나우강의 잔물결'이다.

본디 군악대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라고 하는데, 어쩌다 거리의 선율을 대표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도나우강의 잔물결'에는 이상적인 군인의 용맹과 강인함이 배어 있지 않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차라리 삶의 애환이다. 그것도 환(歡)보다는 애(哀)의 비중이 더 큰 삶. 하기야 슬픔보다 기쁨의 양이 많은 삶이 그리 흔하랴.

원곡의 가사는 들어본 적도 없고, 들어봐야 이해할 턱도 없겠지만, 편곡과 개사를 거친 한국어판 '도나우강의 잔물결'은 내게 익숙하다.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로 '사(死)의 찬미'라는 노래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녹수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다른 버전의 한국어 가사도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이 가사다. '사의 찬미'는 윤심덕(尹心悳·1897~1926)이라는 가수가 1926년 오사카의 닛토(日東) 레코드사에서 취입한 노래다. 가사는 윤심덕이 직접 지었다는 얘기도 있고, 애인이었던 극작가 김우진(金祐鎭·1897~1926)이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

김우진 작품이라면 조금 실망스럽다. 일반 독자들이나 관객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김우진은 '난파' '산돼지' '이영녀' 등 뛰어난 표현주의 희곡을 쓴 극작가이자, 이광수의 강력한 논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김우진의 것치고는 가사가 좀 유치하다는 뜻이다.

취입할 때 반주는 이화여전 음악교수로 있던, 윤심덕의 동생 성덕이 맡았다. 스물일곱 곡을 수록한 이 앨범은 '사의 찬미' 덕분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한다.

1920년대에 한국어로 불린 노래 가운데 '사의 찬미'만큼 생명력을 길게 유지하고 있는 노래도 드물 것이다. 이 노래는 요즘도 노래방에서 자주 불린다. 가사에 실린 비관적 센티멘털리즘이 인간 본연의 감성과 짙게 맞물려 있어서 그런지 모른다.

이 가사에서 1920년대 조선 사람의 어떤 사회정치의식을 읽어내려는 노력은 쓸데없는 짓 같다. '사의 찬미'는, 겉으로 보이는 그대로, 삶의 의욕을 잃은 자의 페시미즘을 담은 퇴폐적 노래다.

편곡을 통해 선율이 훨씬 늘어져, '도나우강의 잔물결'이 본디 지니고 있던 자잘한 경쾌함도 '사의 찬미'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한번 설핏 들어서는 같은 노래인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다. 두 노래 사이의 거리는 1980년대의 저 유명한 운동가요 '5월'과 그 원곡인 프랑스 노래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 사이의 거리보다도 더 멀어 보인다.

레코드 취입을 마친 윤심덕은 도쿄에 머물고 있던 김우진을 불러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 그들은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를 타고 부산으로 향한다. 그러나 끝내 부산에 다다르지는 못한다.

도쿠주마루가 쓰시마섬 옆을 지날 무렵, 두 연인은 갑판에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고 바다로 뛰어든다. 이것이 이른바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 정사(情死) 사건'이다.

국어사전을 들춰 '정사(情死)'를 찾아보니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함께 목숨을 끊는 일"이라 풀이돼 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왜 사랑을 이루지 못했나? 김우진에게 처자가 딸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도덕률로 판단하면, 윤심덕과 김우진의 심약함에 혀를 차게 된다. 아니, 그 당시의 도덕률로도 그렇다. 아주 젊어서 부모가 정해준 아내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도시로 나와 '모던'한 여자와 새 출발을 한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윤심덕과 김우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기대어 두 사람의 약력을 한 줄씩 적자. 윤심덕은 평양에서 태어나 경성여고보(京城女高普)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조선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에 유학해 성악을 전공했다.

김우진은 전남 장성(長城)에서 태어나 일본 구마모토현립농업학교(熊本縣立農業學校)를 거쳐 와세다대학교(早稻田大學校)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왜정 때의 지식인 연인들이 드물지 않게 그랬듯 도쿄에서였다. 당시 도쿄는 고향의 낙후함에 지친 지식인들에게 세계로 열린 창이자 해방구였다. 노래하는 것, 춤추는 것, 그림 그리는 것 따위가 고향에선 천업(賤業)이었으나, 도쿄에서는 예술이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조선 유학생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만났고, 단박 사랑에 빠졌다. 윤심덕은, 아마도 미술학도 나혜석을 제외한다면, 조선 남학생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여학생이었을 것이다.

윤심덕은 성악학도였고 김우진은 영문학도였으나, 두 사람 다 연극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도쿄 유학 중에도 방학 때면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순회극단을 조직해 반도의 이 구석 저 모퉁이를 돌며, 그들 나름의 계몽활동을 했다.

그러는 동안 그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뒤에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로 일하며 성악가로도 이름을 알리고 토월회(土月會) 배우로도 활약한 윤심덕은 끝내 대중가수로 업(業)을 바꾸었다.

돈 때문이었다. 궁핍하기 짝이 없던 어린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성악가' 윤심덕에게는 돈복이 없었다. 주연을 맡았던 이경손 감독의 영화 '동도'도 처참한 상업적 실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야심이 있었다. 그 야심 가운데 하나는 동생 성덕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것이었다. 닛토 레코드사에서 레코드를 취입한 이유 가운데 큰 것도 동생의 유학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동갑내기 윤심덕과 김우진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달랐다. 김우진은 장성 군수의 아들로 유복하게 자라서 가난을 체험한 적이 없었다. 도쿄 유학생들이 조직한 '동우회 순회극단'의 재정을 도맡은 것도 김우진이었다.

그런 김우진이 연인 윤심덕을 넉넉히 돕지 못한 까닭을 알기는 어렵다. 공사의 구분이 또렷한 사람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고, 가족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집안의 경제권이 자신에게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김우진은 자신의 능력으로 윤심덕의 경제난을 해소해줄 수가 없었다. 하물며 결혼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김우진의 작품세계는 자유연애나 이혼 따위를 감당할 만했으나, 그의 또 다른 자아는 보수적 규율에 얽매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사회경제적 조건이 아니더라도, '사의 찬미' 가사는 이들의 어둡고 불건강한 내면을 보여준다. 가사를 쓴 쪽이 누구든, 그 노래는 패배자의 노래다. 가혹하게 말하면 '신 포도'의 노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라는 구절이 '신 포도'의 심리학에서 나왔을지라도, 그 구절은 결국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 구절은 정직했다. 그 정직이 순간적 충동에서 나왔든, 헤어날 수 없는 절망에서 나왔든 말이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 사건은 조선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큰 스캔들이 되었다. 조선의 주요 신문들이 연일 이 사건을 사회면 톱으로 다룬 것은 물론, 일본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요즘으로 치면 이 두 사람은 일종의 연예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과 그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든, 사실을 향한 충성을 위해서든,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하자. 윤심덕은 김우진의 연인이기에 앞서 조선의 첫 소프라노 가수였고, 김우진은 윤심덕의 연인이기에 앞서 1920년대의 뛰어난 표현주의 극작가였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