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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풀섶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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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풀섶 관현악단

입력
2009.08.3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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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금 빗줄기가 지나간 뒤 날씨가 한층 서늘해졌다. 일시적으로 북쪽에서 확장하는 고기압 탓이라고 한다. 한 여름 떠들썩했던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풀벌레들이 제 세상을 만났다. 한적한 교외까지 안 나가더라도 도심공원이나 산책길에서 온갖 풀벌레의 연주를 즐길 수 있다. 제멋대로 소리소리 질러 화음과는 전혀 상관 없지만 나름대로 심금을 울리는 자연의 교향악이다. 어떤 것은 구슬프고 어떤 것은 숫제 소음이지만 모두가 짝을 얻으려고 혼신을 다해 부르는 세레나데다. 어둠이 깔리는 초저녁 풀섶에서는 풀벌레 관현악단의 최상의 연주가 펼쳐진다.

■ 단원들의 면면을 알면 풀벌레들의 연주를 한층 더 잘 즐길 수 있다. 별별 녀석이 많고 연주 소리도 다양해 일일이 알아보고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대표 연주자 몇몇쯤은 구분할 줄 알아야 자연의 교향악을 즐길 자격이 있다. 풀섶 무대의 대표적인 현악기 연주자는 단연 귀뚜라미 종류다. 오른쪽 앞날개 현을 왼쪽 앞날개 가장자리로 문질러 소리를 내는데, 귀뚜르르르~ 하고 우는 왕귀뚜라미 소리가 가장 맑고 리드미컬하다. 극동귀뚜라미 소리는 귀뚤귀뚤 비교적 단조롭다. 귀뚜라미 종류인 방울벌레는 '히리이링~ 히리이링~' 하고 처연한 소리를 낸다.

■ 여치 무리도 빼놓을 수 없다. 보통 여치는 '찍 지이잇 찍 지이잇' 하고 단조롭고 날카롭게 운다. 베짱이는 '쓰이~쩍 쓰이~ 쩍' 베 짜는 소리를 낸다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작은 새만한 철써기는 '차카차카차카…'라고 시끄럽게 운다. 중부 이남에 주로 서식해 서울 근방에서는 보기 어렵다. '키링키링키링키링' 긴꼬리 소리는 맑은 고음이어서 알아보기 쉽다. 칡 잎 같은 넓은 잎에 구멍을 뚫어 머리만 내민 채 앞날개를 부벼 소리를 내는데 넓은 잎은 소리를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다. 귀뚜라미도 작은 땅굴을 파 소리를 증폭시키는데 미물들의 지혜가 보통이 아니다.

■ 풀벌레는 장마가 끝나는 7월 말부터 시작해서 요즘 같은 늦여름에 가장 왕성하게 운다. 기온이 떨어지면 풀벌레 소리가 더 명징해지고 듣는 이의 가슴을 한층 더 파고 든다. 미처 결실을 맺을 준비도 없이 새로운 계절을 맞는 마음이 바빠지면서도 감상에 젖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올해는 안타깝고 아쉬운 죽음도 많았다. 아직 떼조차 제대로 자라지 않았을 그 분들의 무덤에도 밤이 이슥하면 풀벌레들의 소리 자욱할 것이다. 풀섶의 풀벌레 관현악단의 연주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진혼곡이기도 하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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