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파이페 지음ㆍ송소민 옮김/서해문집 발행ㆍ360쪽ㆍ1만2,900원
말기 대장암 판정을 받은 60대의 한 남자. 성실한 조경사이자 자상한 가장이었던 이 남자가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선택한 것은 유럽 걷기 여행이었다. 수술을 하고 인공항문을 단 그는 가족과 의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 북부 쿠퍼뮐레에서 이탈리아 로마까지 3,350㎞를 걷는 대장정에 들어간다.
<천천히 걸어, 희망으로> 는 독일인 쿠르트 파이페가 2007년 3월부터 166일 동안 유럽을 걸으면서 겪은 경험과 감상을 모은 책이다. 천천히>
그는 평생 유럽 걷기 여행을 꿈꿨으나 시간과 돈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미뤘다가 극한 상황에 몰린 뒤에야 도전할 수 있었다. 쿠퍼뮐레에서 시작해 함부르크와 첼레,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스위스를 넘은 뒤 이탈리아 제노바, 피사, 피렌체를 지나 로마에 이르는 길을 그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하루 20㎞씩 걸었다. 도시와 숲과 벌판을 지나면서 넘어질 때도, 구를 때도 있었지만 지친 몸을 뉠 곳은 외양간, 헛간, 텐트 같이 결코 아늑하지 못한 곳들이었다.
하루 종일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할 때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날이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외로움이 사무칠수록 지난 세월을 회상하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았다. 생각의 쓰레기를 치우고 생각에 새로운 무게를 실을 수 있었다. 영혼마저 가벼워지는 것 같았고 마침내 죽음이나 고통마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에서 만난 사람과는 스스럼없는 친구가 됐다. 그들은 대가 없이 방을 내주고 음식을 나눠 주었으며 함께 걸었다. 쿠르트는 그들에게 자신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60이 넘은 나이에 세상이 그렇게 나쁘고 이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한다. 일부 구간에서 동행한 아내와 동생은 그에게 가족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최악의 경우 길에서 죽음을 맞을 수도 있었겠지만 쿠르트는 그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그는 그리고 말한다. "당신에게 기쁨과 충만함을 가져다 주는 일에 첫 발걸음을 떼라. 당신의 소원이 사람들의 눈에 턱없이 미친 짓으로 보인다 해도 상관 없다."
여행을 다녀온 뒤 한동안 건강을 회복했던 쿠르트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책이 출간된 2008년 8월 8일 자신의 책을 손에 쥔 채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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