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죽음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자 정부가 바짝 긴장했다. 성모병원 영안실에 있던 학생들을 전원 연행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그리고 장례식을 치르려고 이소선 어머니를 온갖 방법으로 회유하거나 협박했다.
무엇보다 돈으로 회유하려고 위로금을 3,000만원이나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소선 어머니는 돈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돈으로 회유하려는 당국자들에게 온갖 모욕적인 언행을 다 동원해가며 저항했다.
가난하기 짝이 없고, 3,000만원이면 고급주택을 사고도 남을 돈인데도 그 돈을 거부하고 오직 아들의 뜻을 이루어줄 것만을 요구했다. 사실 이소선 어머니가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아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데는 그 돈을 받지 않은 데서 오는 자긍심이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정부로서는 전태일의 장례를 더 미룰 수가 없었다. 학생데모가 격화되는 데다 정치권조차 노동문제를 정치쟁점화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소선 어머니가 요구한 8개항의 요구조건, 곧 '일요일은 쉬게 할 것', '노동조합의 설립을 보장할 것' 등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우리 학생들은 당시 이소선 어머니로부터 전태일 동지의 시신인수증까지 받아두고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이 참여하는 대규모 장례식을 준비했었다. 하지만 경찰이 성모병원 영안실을 포위함으로써 시신을 확보할 수 없었던 데다 정부가 이소선 어머니의 요구조건을 수용하고 장례를 치르기로 함으로써 학생 장례식은 별도로 치를 수 없었다.
전태일 동지의 장례식은 11월19일 이소선 어머니가 다니던 서울 쌍문동의 창현교회에서 '한국노총장'으로 치러졌는데, 장례위원장은 최용수 한국노총위원장이, 호상은 이승택 노동청장이 맡았다.
비록 관제장례식이었지만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다. 한 노동자의 장례에 노동청장(현재의 노동부장관)이 호상을 맡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있기 어렵다. 정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말해준다.
정부는 전태일 동지의 묘소를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으로 정해서 전태일을 땅 속에 묻어버리려고 했으나 전태일은 인간해방운동의 불꽃으로 되살아났고, 그곳은 110명이 넘는 민주영령이 잠든 민주성지가 됐다.
장례식을 치를 수 없게 된 학생들은 11월20일 서울법대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 연합해서 '고 전태일 선생 추도식'을 거행코자 했다. 그러나 정부에서 이미 서울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린 가운데 기동경찰이 서울법대 정문을 차단해 다른 대학 학생들은 학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이미 들어와 있던 서울법대, 서울문리대, 이화여대 학생 400여명이 추도식을 거행했다.
전태일의 친구인 최종인이 전태일 동지가 분신할 당시의 상황과 평화시장의 작업환경을 설명하여 학생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런데 이날 발표한 공동결의문에서 우리 학생들은 전태일을 우리 사회 최고의 경칭이라 할 '선생'으로 불렀는데, 당시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전태일은 비록 스물둘의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 어떤 나이든 학자보다 더 큰 가르침을 우리 모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추도식을 마친 학생들은 교문을 박차고 나가 '전태일 선생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근로자의 인권을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서울문리대 쪽으로 진출했으나 기동경찰의 저지에 막혔고,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결국 학교 안으로 밀려들어 법대 도서관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런데 학생 중심의 전태일 투쟁은 11월 말 겨울방학을 맞으면서 중단되고 사회단체나 교회에서의 전태일 관련 집회도 일단 중단되었다. 그러나 전태일이 제기한 노동문제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화두가 되었다.
무엇보다 전태일 동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청계피복노동조합은 '전태일 정신 계승투쟁'의 중심이 되어 이 땅 민주노동운동의 초석이 되었음은 물론, 민주화운동의 견인차가 되어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전태일의 뜻은 비록 미완이기는 하나 엄청나게 이루어졌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전태일은 인간해방운동의 꺼질 수 없는 불꽃이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기술하겠지만 여기서 개략적으로나마 밝혀두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소선 어머니의 역할은 참으로 지대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의 기둥으로, 민주노동운동의 대모로, 그리고 민주열사 어머니 아버지들의 버팀목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전태일 동지의 친구들은 그 엄혹했던 시절 청계노조를 건설해서 지키고 키워온 것은 물론 특히 이소선 어머니를 친 어머니처럼 섬겨왔으니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청계노조가 민주노동운동의 초석이자 민주화운동의 견인차로 역할 하는 데는 청계노조 조합원들의 생명을 건 투쟁이 있었음이 잊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소선 어머니는 팔순을 맞아 낸 회고록의 제목을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라고 했는데, 수고한 분들은 너무 많은데 감사의 뜻을 전하기가 어려워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오랜 기간 전태일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온 사람으로 전태일이 주는 최대의 교훈을 정리한다면 '고난을 통해 사랑을 얻는 사랑의 원리'와, '사랑을 통해 지혜를 얻는 지혜의 원리'와, '사랑과 지혜를 통해 해방된 삶을 얻는 해방의 원리'가 아닐까 싶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전태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늘 우리가 겪는 경제 침체와 사회갈등의 근본원인은 일찍이 전태일 동지가 지적했던 대로 '금전대의 부피'만을 생각하고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 때문일 텐데, 전태일의 인간해방사상이야말로 그 해법이 되리란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전태일 사상 구현운동이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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