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구기동의 고급 주택가에 자리한 H빌라. 중견기업 대표 이모씨는 별장으로 이용하는 이 집을 팔려고 내놨다가 세를 들고 싶다는 40대 여성의 연락을 받았다.
월세 계약을 맺기로 약속한 지난 21일 이 여성은 고급 중형차를 타고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나타나 곧바로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 300만원을 건넸다. "이사하기 전에 도배를 새로 하고 인테리어를 바꾸고 싶다"는 이 여성의 말에 이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현관 잠금장치의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다음 날 간소한 짐을 싣고 온 이 여성은 나흘 동안 자녀들과 이 집에 머물면서 인테리어 업자를 불러 싱크대 교체 등 견적 600만원 짜리 공사를 맡겼다. 그리고는 공사 업자에게 "며칠 뒤 1,000만원 짜리 수표로 결제할 테니 잔액 400만원을 먼저 통장에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업자 역시 이들이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별다른 의심 없이 일러준 계좌로 돈을 보냈고 공사도 일부 진행했다. 이 여성은 또 독일제 유명 주방용품 800만원 어치를 주문해 들이면서 판매상에게 "이틀 뒤 돈을 받으러 오라"고 말했다.
25일 오전 이 여성은 경비원에게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살림을 잠시 뺄 것"이라고 말한 뒤 남편이라는 사람이 몰고 온 고급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사라졌다.
곧이어 1톤 트럭을 몰고 온 두 남자는 이 집에 있던 집 주인 이씨 소유의 가구와 오디오를 모두 빼냈다. 줄잡아 3,000만원 어치의 고급품들이었다. 이들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경비원이 집주인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으나 닿지 않았다.
경비원이 집주인 이씨의 전화를 받은 것은 트럭이 짐을 싣고 유유히 사라진 오후 1시께. 다급히 집에 도착한 이씨는 새로 설치된 현관 잠금장치부터 뜯어내야 했고, 이어 텅빈 60평 집안을 확인해야 했다.
물품 대금을 받으러 줄줄이 찾아온 업자들도 황당함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경비원은 "주방용품 판매상은 덤으로 준 것만 100만원 어치라며 당장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며 "어린 두 남매가 마당에서 천진하게 뛰어 놀기까지 하니 새로 이사올 가족이라고 안 믿을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경찰도 '신종 사기절도 수법'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한 경찰관은 "관할 지역에 부촌이 많지만 세입자를 가장해 세간을 훔쳐가는 사건은 처음 봤다"며 "이사 전 사람을 집에 들일 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피해자 이씨의 신고를 접수한 서울 종로경찰서는 가족을 가장한 사기단의 소행으로 보고 피의자들을 쫓는 한편, "여자가 부른 업자가 5명쯤 된다"는 경비원 진술을 확보하고 추가 피해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박민식 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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