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말까지 좋은 모습을 보인 대통령은 우리 헌정사에 없다. 국가부도 상태에서 퇴임한 YS와 내내 구설에 휘말렸던 노무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번에 열화 같은 국민적 재평가로 부활한 DJ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주변비리에 상처 입고, 공들인 햇볕정책마저 의미가 퇴색된 상황에서 쓸쓸히 단상을 내려갔다. 군사문화를 일소하고, 국가경제를 구해내고, 역사가치를 새로 세운 대통령들의 능력과 자신감은 대체로 집권 초 1~2년까지였다.
그에 비해 이명박 대통령은 판이한 경로를 거쳤다. 인수위 때 벌써 국민들이 질릴 만큼 정책구상들을 쏟아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인사 실패, 광우병파동과 촛불시위, 세계경제 공황, 남북관계 경색과 핵 위기, 노 전 대통령의 투신…. 역량 때문이든, 불가피한 외부상황에서 비롯됐든 이토록 호된 신고식을 치른 전례는 없었다. 국민들은 일찌감치 남은 임기를 헤아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마디로 절망적인 분위기였다.
보수 부담 털어내고 자신감 회복
그런데 묘하게 상황이 바뀌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정국 때까지만 해도 밝지 않던 MB의 표정과 말투에서 자신감이 내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분기점은 6월 말 '중도실용-서민 중시' 노선을 선언한 때였던 것 같다.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같은 얘기가 반복됐다. 쌍용차 사태 때 조급하게 공권력을 개입시키지 않은 것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 설치와 장의형식 결정과정 등에서 보인 뜻밖의 유연함은 확실히 자신감의 발현으로 볼 만한 것이었다.
변화의 원인은 '탈이념'을 매번 강조하는 MB의 말에서 짚인다. 대선과정에부터 옥죄어온 이념의 족쇄에서 비로소 풀려난 것이다. 정확히는 강경보수로부터의 족쇄다. '중도실용-서민 중시' 선언 이후 진보좌파의 "기만책" 반응보다 보수우파의 "정체성 상실" 비난 쪽에서 훨씬 더 절박함이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MB에게 더 큰 부담은 좌파가 아니라 '잃어버린 10년'을 내걸고 그를 도와 정권을 창출한 드센 보수진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유시장경제 신봉자라는 점에서만 막연한 우파성향일 뿐, 삶 어디에도 이념을 고민했을 만한 이력은 없다. 그는 가치중립적인 이익과 손실계산에 익숙한 기업인 출신이다.
이게 MB가 헤맨 이유다. 체질과 환경이 따로 놀았던 것이다. 앞 대통령들이야 이념적 좌표가 분명했던 만큼 지지층과 정체성의 괴리를 느낄 여지는 크지 않았다. 촛불정국 때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들으며 감회에 젖었다는 고백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때도 그는 좌파 진영으로부터 "속임수"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보수진영에게는 나약함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더 모진 욕을 먹었다.
결과적으로 최근 서거정국에 이르기까지 겪은 악재들은 거꾸로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간단없이 정치ㆍ사회적 위기가 이어지면서 그를 통해 고토 회복을 하려던 강경보수진영의 설득력이나 정당성은 크게 약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부채의식을 털어냈고 독자적인 '중도실용' 선언은 빚 청산의 결과물이었다.
성공 관건은 변화의 진정성 여부
이렇게 보면 MB정권은 확실히 고비를 넘었다. 대통령의 책무가 경제회복, 남북관계 관리, 사회통합이라면 각각의 상황여건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세계경제는 저점을 지나 사이클상 2~3년 후면 호황국면일 가능성이 높고, 남북도 끝까지 가보자는 식의 테스트기간이 끝나 관계개선을 모색해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문제는 사회통합인데 이념의 틀을 벗어 던진 그가 어느 쪽과도 소통 못할 이유는 없다. 소수지만 연대 강하고 목소리 큰 강경 좌ㆍ우파로 인해 계속 소란스럽겠지만 과거와 같은 격한 양상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MB는 퇴임이 쓸쓸하지 않은 첫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변화가 집권 초기 실패에 대한 진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 맞고, 또 그 변화의 진정성을 끝내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만 그렇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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