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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10> 퇴역마 '다이와 아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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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10> 퇴역마 '다이와 아라지'

입력
2009.08.30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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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웽대는 파리들이 성가신 듯 육중한 몸을 흔들 때마다 고여있던 오후의 햇살은 호두나무 살빛처럼 깊이 번득이며 미끈한 근육의 결을 따라 흘렀다.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목과 꼬리의 엇갈린 흔들림에 근육과 동맥들도 완벽한 리듬과 균형으로 움찔거렸다. 세포 하나하나가 간직한 질주의 기억…. 폭발을 예비하던 긴장의 맥박이 3평 남짓의 옹색한 마방 안에서도, 그 절제된 심줄의 율동 속에서도, 희미하게 감지되곤 했다. 지난 20일 오후, 날은 맑았고 전북 정읍 초원목장의 볕은 따가웠지만, 제가 선 땅의 탄력이 아직 낯선 듯 발굽으로 툭툭 쳐보며 이따금 고개를 들고 아득히 먼 곳을 응시하던 퇴역 경주마 '다이와 아라지'의 눈빛은 질주의 본능으로 서늘했다.

지난 4월 26일 서울경마공원 2,000m 혼합1군 경주. 녀석은 어쩌면 그 날 경주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시합임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며칠 전 생일까지 지났으니 꽉 차서 넘치는 열 살. 두세 살이던 2001~2002년 일본 무대에서 7번을 뛰어 단 한번도 상금등수 안에 들지 못했고, 해서 내쳐지듯 팔려온 이 곳 한국 무대였다.

다이와 아라지는 2003년 5월 이래 68차례의 경기에 출전해 14번을 우승했다. 상금 획득 등수(1~5위)에 든 것만도 46차례. 전미 챔피언이었다던 부마(夫馬) '아라지'의 명성에는 못 미쳐도, 그만하면 자족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성적.

우승마끼리 겨루는 대상경주에서는, 실력은 충분하다는 전문가들의 중평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고, 그래서 꽃다발 메고 팬들의 환호 속에 뿌듯하게 나설 퇴역식은 기대할 수 없는 무관의 제왕. 그리고 마지막 경주.

그 날 다이와 아라지는 자신이 누볐던 주로와 작별하듯 넉넉한 호흡으로 달렸고, 함께 달린 열한 마리의 손자뻘들을 모두 앞세운 채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꼴찌였고, 스스로 누린 자신만의 퇴역식이었다.

며칠 뒤 조교사 서정하(51)씨는 경마팬 사이트에 다이와 아라지의 퇴역 결정을 알렸고 몇몇 팬들은 답글을 남기기도 했다.

- 정말 기억에 남는 불꽃 추입(追入ㆍ추월을 뜻하는 경마 용어)의 대명사였죠.

- 제가 본 말 중에 가장 멋진 엉덩이를 가진 말이었어요. 우리끼리 은퇴식 해요.

지난달 다이와 아라지는 전북 정읍의 한 자마 생산목장으로 거처를 옮겨 경주마가 아닌 씨숫말로 남은 생애를 시작했다.

팬들의 추억처럼, 다이와 아라지는 '불꽃 추입의 대명사'였고, 녀석은 승패의 결과보다 과정의 드라마를 위해 달렸다. 다이와 아라지를 처음 맡아 근 5년간 관리했던 조교사 박희철(48)씨의 말이다.

"다이와 아라지는 제 바깥쪽으로 지나가는 건 대수롭잖게 여겼지만 제 안쪽에서 누가 파고들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던 묘한 성격의 말이었어요. 그걸 안 뒤로는 초반엔 체력을 안배하며 안쪽 레인에서 뛰게 하다가 중반 이후 맨 바깥 레인으로 나서도록 기수들에게 지시하곤 했어요."

육상 100m의 우사인 볼트와 같은 압도적 카리스마도 좋지만, 극적인 감동으로 치자면 아무래도 수영 400m에서 박태환이 보여준 막판 폭발력과 역전의 짜릿함이다. 다이와 아라지는 그런 경주마였다.

주력 종목은 1,900와 2,000m급 중장거리. 심장이 터져라 2분 남짓 달리고 나면 말의 몸무게는 10~15㎏씩 예사로 빠지고, 500㎏에 육박하는 제 몸의 중량을 주체하지 못해 휘청댈 정도라고 한다.

"다이와 아라지는 자기가 이긴 걸 아는 것 같았어요. 경주에서 우승한 뒤에는 더 거뜬해지는 체력과 근성을 갖춘 말이었어요." 역시 박 조교사의 말이다. "녀석은 제 시선을 피한 적이 없어요. 복종은커녕 묘한 적의 같은 걸 보였죠. 심지어 저를 물기도 했어요."

말과의 인연 23년, 한 해에만도 10마리 남짓한 말들을 퇴역시키는 조교사 경력 7년의 그는 "녀석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이와 아라지는 조교사인 저까지 끝내 이겨먹은 말이었고, 버려진 말에게도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말이었어요."

2006년 말 이후 다이와 아라지의 성적은 급격히 꺾이기 시작했다. 여덟 살이라는 나이와 체력의 한계가 거론됐고, 주변에서는 조심스럽게 은퇴 시기를 저울질했다.

서정하 조교사가 녀석을 맡은 게 그 즈음인 2007년 3월이다. "기량이며 체력이 눈에 띄게 하향세였어요. 훈련을 시켜보면 크게 나쁜 덴 없었지만 나이가 있으니 탈 안 나게 관리해주다가 은퇴시켜야겠거니 생각했죠." 하지만 그 해 4월 2,000m 경주에서 다이와 아라지는 12마리 중 2등을 한다.

다음 달 2,300m에서도 2등, 또 다음달 2,000m 3등…. 심지어 2008년 6월의 대상경주에서는 기라성 같은 젊은 챔프들을 제치고 3등으로 결승선을 타넘기도 했다.

은퇴 얘기를 꺼내던 사람들은 민망한 듯 '회춘'을 들먹였지만, 그럴 때 쓰는 말이 오기(傲氣)일 것이다. 드라마들이 즐겨 그려온 바, 늙은 챔프의 혼신의 투혼 같은 것.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 마사에서 저 마사로 옮겨질 때마다 근성을 자극하던 묘한 열패감…, 온 존재의 무게를 실어 '나 아직 안 죽었다'고 외치는 마지막 포효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말의 경주가 언제 시작됐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쩌면 말들은 제 종(種)이 지구에 터를 잡은 이래로, 인류 생명의 역사 훨씬 전부터 서로의 어깨를 견주며 종의 본능으로 달렸을 것이다.

경주가 제도화된 것은 말의 속도를 인간의 가치체계_이를테면 전투의 우위나 위엄의 표상 따위_안으로 포섭한 이후일 것이고, 우열을 가려 돈을 분배하는 상업 경주는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인간이 개입한 이래로 말은, 대다수 가축화한 동물들이 그러하듯 우생의 논리 속에서 철저히 관리됐고,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경주마는 수천 년을 이어온 빛나는 족보의 후광을 거느리게 됐다.

대신 인간이 정한 우생의 기준을 거스르는 말들, 경계를 벗어난 말들은 당연히 무대의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다. 올 들어 지난 7월 말까지 서울경마공원에서 퇴역한 경주마는 총 524두. 그 가운데 유원지나 승마장 등으로 팔려간 게 226두이고, 안락사 당하거나 육용으로 팔려가는 말도 상당수라고 한다. 번식마로 전업한 것은 35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다이와 아라지는 경주마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노년의 궤도에 진입한 셈이다. 2세마들의 기량이 뒷받침돼야겠지만, 최소한 얼마간은 자신의 이름이 그들의 이름 뒤에 따라다닐 것이다.

말의 발정기는 2~6월이고, 다이와 아라지가 기거하는 목장에는 16두의 미끈한 암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간식을 제하고 하루 두 끼의 정찬 때마다 녀석은 주인이 홍삼 가루와 미네랄, 비타민 따위를 섞어 만든 사료로 제 몸을 보하고 있다.

이제 더는 힘든 훈련도, 승부의 스트레스도 없다. 세상은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대신 아비보다 나은 자손을 잉태시키라고 말한다. 녀석에게 허락된 운신의 공간은 턱없이 비좁아졌지만, 누리게 된 시간의 부피는 한없이 확장됐다. 그래서 녀석은 행복할까. "권태보다는 지옥을 달라"고 했던 시인을 우리는 알고 있다.

폭염이 드세니 외출을 삼가라는 일기예보의 아나운서 멘트를 들으며 서울경마공원을 찾던 날, 내 손에는 수첩 대신 노 시인의 신작 시집(허만하 <바다의 성분> , 솔 발행)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관람석은 만원이었고, 젊고 싱싱한 말들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으로 주로의 모래땅을 짓이기며, 시인이 '틈새의 말'이라는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자기 발굽 소리 한 치 위에 떠" 날고 있었다.

몽골 풀밭을 내닫던 태고의 내력을 간직한 존재들. "자기가 열어젖히는 아득한 지평선이 다시 멀리 펼쳐지는 새 지평선이 되는 변신을 아는" 그 경이의 말들이 출발 주로에 모여 "가늘게 떨며 사라지는 화살의 운동과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서 자리잡은 운동 직전의 완벽한 정지 그 틈새"에 서 있었다.

푸른 근육의 탱탱함과 73세 노 시인의 저 팽팽한 시적 긴장이 대치하는 '틈새'에 서서, 나는 저 먼 농장의 옹색한 마사에서 이 주로를 떠올리고 있을 늙은 퇴역마 다이와 아라지를 상상했다.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베르트랑 베르줄리의 책 <슬픈 날들의 철학> (개마고원 발행)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는 시험의 끊임없는 긴장과 고단함을 위로하며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보다 더 나쁜 것은, 싸워서 지켜내야 할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이라고 적었다.

늙음, 퇴역, 섭리 따위의 쓸쓸한 단어들과 함께, 섭리는 섭리이기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지 정당해서 복종하는 것은 아니라 했던 파스칼의 저 차가운 위로도 떠올렸던 것 같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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