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LG화학은 당시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 제너럴모터스(GM)로부터 한 통의 제안서를 받았다. 자사가 개발중인 전기자동차에 맞는 배터리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GM의 러브콜에 LG화학은 반신반의했지만, 알고 보니 GM은 전세계 유명 배터리 회사에 같은 내용의 제안서를 보냈던 것. 당시만 해도 LG화학은 GM과 파트너가 되고 싶어하는, 수많은 후보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후 2년에 걸쳐 서바이벌게임이 전개됐다. GM이 전기차 배터리 개발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개최한 컨퍼런스에 참가한 업체는 모두 25개사. 3개월 만인 2007년 6월 LG화학, 독일 컨티넨탈-미 A123시스템즈 컨소시엄 등 두 업체의 레이스로 좁혀졌다.
컨티넨탈은 세계4위의 자동차부품제조사였고, A123은 미국 배터리업계의 구글로 평가받는 유망기업. 업계에서는 당연히 두 거대기업의 컨소시엄이 승자가 될 것으로 점쳤고, LG화학은 상대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서바이벌 게임의 승자가 가려진 건 올 1월 미 디트로이트 모터쇼였다. GM이 이 자리에서 내년부터 양산할 전기자동차 시보레 '볼트(Volt)'의 리튬이온폴리머 배터리 단독 공급자로 'LG화학'을 최종 선정한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세계적인 모터쇼 행사장에서 GM이 LG화학의 손을 들어주자, 장내는 한동안 술렁거렸고 이어 축하의 박수가 쏟아졌다. 이로써 LG화학은 만 천하에 세계 최고의 배터리회사라는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함재경 LG전자 중대형전지사업담당 상무는 "기술 및 성능을 인정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0년여 넘게 휴대폰 노트북 등 소형 배터리를 생산하면서 축적된 경험, 그리고 미 정부와 GM-포드-크라이슬러 등 빅3 자동차메이커의 배터리개발 컨소시엄 USABC의 국책과제에 참여한 사실 등이 LG화학의 리튬이온 배터리가 좋은 평가를 받게 된 배경"이라고 꼽았다.
A123컨소시엄은 아직 배터리 양산 경험이 일천했고, 안전성과 성능의 측면에서 적절한 조화를 찾는 데 실패한 것이 패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LG화학이 전기자동차의 미래 가능성만 믿고 무작정 중대형 배터리 연구개발에 매달리기 시작한 지 10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그래서 LG화학은 만만치 않은 경쟁업체보다 더 무서운 내부와의 고독한 레이스를 펼쳐야 했다.
LG화학이 GM프로젝트에 뛰어든 때는 전기자동차용 중대형 배터리를 '전략종목'으로 찍고 2000년부터 본격 개발에 뛰어들어 7년 가까이 흐른 상황. "특히 전기차용 배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맞춤형'이기 때문에, 파트너 자동차 업체가 없는 상황에선 무엇을 개발해야 할지 목표부터 불분명합니다.
차라리 기술 개발에서 막힌 거라면 밤을 새서라도 답을 찾으면 될텐데, 이건 돈벌이가 될지 확신도 없이 몇년째 연구개발만 하고 있으니 당연히 연구팀은 회사 내에서조차 눈치가 보이고 힘들 수밖에요." 함 상무는 이렇게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GM과의 프로젝트는 LG화학으로서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휴대폰 노트북 등 소형 2차전지 사업에서 10년여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고 현대자동차의 아반떼 하이브리드카용 리튬이온 배터리 개발도 진행 중이었지만, 온전히 전기로만 움직이는 자동차를 위한 배터리는 전혀 달랐다.
GM전기자동차용 배터리를 만들기 위해서 연구팀이 풀어야 할 과제는 한둘이 아니었다. 소형배터리는 2년 안팎을 버티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전기차 배터리의 수명은 자동차 수명과 엇비슷하게 10년 정도는 가야 했다.
전기차용 중대형배터리는 팩 하나에 셀 400~500개가 들어가므로 배터리 셀마다 성능이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생산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또 높은 출력을 뽑아낼 필요가 있는 하이브리드카용 배터리와 달리, 전기차용 배터리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LG화학 연구팀은 GM 볼트에 들어맞는 배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없이 배터리 셀에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종류와 혼합 비율을 바꿔가면서 최적의 조건을 찾아야 했다. GM 볼트에 탑재될 리튬이온폴리머 배터리는 크기 180㎝, 무게 180㎏, 전력량 16㎾h로, 통상적인 니켈수소 배터리보다 50% 이상 높은 출력과 에너지를 공급하면서도 가볍고 부피는 작다.
캔 타입이 아니라 평평한 파우치 타입으로 두께가 얇을 뿐 아니라 열이 발생해도 '펑'하고 폭발하지 않고 옆으로 새나오도록 했고 망간계 양극재와 세라믹코팅 분리막을 적용해, 자동차 운행에서 중요한 '안전성'문제도 해결했다.
물론 리튬이온 중대형 배터리는 이제 막 개발 초기 단계여서 더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도 넉넉지 않았다. 전기자동차 배터리는 샘플 하나 만드는 데 꼬박 한달이 걸리기 때문에, 성능테스트까지 하면서 시간을 맞추기에 빠듯했다. 담당자들이 비행시간만 15시간이 넘는 디트로이트를 수십차례 오갔다.
고작 2시간 회의를 위해 날아간 적도 있고, 때론 한달 가까이 머물러야 했다. 대전 배터리연구소 등 한국에 남아있는 연구팀은 24시간 풀가동이었다. 미국과의 시차로 인해 GM이 새벽 2,3시에 보내는 주문사항을 받아서 빠른 시간내에 해결해 답하기 위해서였다.
LG화학은 애초부터 자동차 배터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업체들이 주력하고 있는 니켈수소 배터리로는 GM 프로젝트에서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1998년 2차전지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LG화학은 일관되게 리튬이온 배터리에 매달렸다.
이미 일본 업체들이 시장을 선점한 니켈수소 배터리에는 후발주자로선 뒤쫓아가기 어렵다는 가혹한 현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없는 선택이 됐다.
LG화학 관계자는 "경영진과 연구진 모두 중대형 전지 개발 초기부터 올인해 온 '리튬이온' 기반 배터리가 향후 니켈수소 배터리를 대체하리라는 미래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없다"며 "전기차 시장이 커지면서 리튬이온 배터리로 시장이 움직여가고 있는데, LG화학이 기선을 제압했다"고 말했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
■ 함재경 LG화학 상무
LG화학의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프로젝트는 현재 현대ㆍ기아차, 제너럴모터스(GM)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LG화학의 잠재적 고객리스트에는 전세계 모든 자동차업체들이 올라있다.
GM의 첫 양산 전기자동차 시보레 볼트에 이어 뷰익 SUV형 전기차에 리튬이온배터리를 공급하기로 하며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여기서 멈춰서지 않고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선도하는 '리더'로 치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함재경(51) LG화학 중대형전지사업담당 상무는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의 빅3 자동차업체는 물론 닛산 도요타 혼다 등 전세계 주요 자동차업체들이 모두 고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전기차 시장이 확대될수록 배터리업체 중 '화려한 싱글'인 LG화학이 유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전기자동차 시장의 강자로 군림 중인 일본 업체들의 경우 신규시장 선점을 위해 자동차업체와 전지업체가 합작을 통해 견고한 '혼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당장은 LG화학이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도요타는 파나소닉과, 닛산은 NEC와, 혼다는 산요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다. BMW의 전기차에 배터리를 단독 공급하기로 한 삼성SDI도 세계 최대 자동차부품 보쉬사와 합작으로 전기자동차용 배터리업체 SM리모티브를 만들었다.
하지만 LG화학은 '싱글'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어떠한 자동차제조사와도 파트너십 구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10만대 규모에 불과한 전기자동차 시장이 2013년 50만대, 2015년 100만대로 급성장하면,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도 '혼인' 관계에만 의존해 배터리 공급을 받는 것으론 수요를 채우기 어려울 수밖에 없어진다.
함 상무는 "전기차 배터리는 효율적인 규모의 생산이 가능하도록 적기에 투자해야 하는 비즈니스"라며 "전기차 배터리 수요가 많아지면 당연히 자동차업체들은 제2의 배터리 공급처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유부녀'보다는 '화려한 싱글'에게 손을 내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미 미시건주에 추진하고 있는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공장 건설과 관련, 미 연방정부 및 주정부로부터 총 2억8,000만달러를 지원받게 됨으로써 예상되는 투자비용을 거의 충당하게 된 것도 호재다.
함 상무는 "미국 내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을 물론 앞으로 가격 경쟁력 등에서 다른 업체들에 비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고객 확보는 단지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현재 전기차 배터리는 특정 자동차 모델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맞춤형으로 개발되지만, 시장이 커지려면 '기술 표준화'부터 이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많은 고객을 확보해둘수록 LG화학이 업계 표준화를 선도할 수 있는 입지가 탄탄해진다는 것이다.
문향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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