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전시장 가운데 육중한 유리 진열장이 놓였다. 어떤 진귀한 보물이라도 들어있는 걸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커피잔, 스푼, 촛대, 양념통 등 온갖 잡다한 집기들이 짝도 맞지 않은 채 늘어서있다.
'뮤지움 디스플레이'라는 제목의 이 설치작품은 작가 함경아(43)씨가 지난 10년간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등 전 세계를 여행하며 카페와 호텔, 비행기 등에서 '슬쩍한' 것들이다. 훔친 물건을 거창한 유리 진열대에 넣어두고 전시를 한다고?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은 잠시 뒤로 보류해두자.
영국 대영박물관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계기가 된 로제타스톤과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뜯어온 벽화 엘긴 마블 등 수많은 약탈 문화재로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나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도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 람세스 1세의 석상은 루브르박물관에, 아들인 람세스 2세의 석상은 대영박물관에 나뉘어져 있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우리의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다. 끊임없는 반환 요청에도 약탈국들은 묵묵부답이다.
최근 프라하비엔날레, 아시아퍼시픽트리엔날레 등을 통해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 함경아씨의 '욕망과 마취'전은 사진, 설치, 회화, 영상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약탈 문화재라는 민감한 문제를 민감한 방식으로 건드린다.
텍스트와 사진으로 이뤄진 '훔쳐지고 뒤바뀐 사물들'은 작업 내용을 설명해준다. 그는 에어프랑스에서 주는 플라스틱 컵을 한국에서 가져간 다른 컵으로 바꾸고, 프랑스 건축미술관과 서울 커피숍의 에스프레소 잔을 바꿔치기했다.
훔치고, 맥락에 맞지도 않는 엉뚱한 장소에 갖다놓고, 이를 유리 안에 보호해 전시하는 전 과정이 문화재 약탈의 모양새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Steal Life' 시리즈는 함씨가 훔친 물건들을 바로크 정물화처럼 연출해 찍은 사진 작업이다. 17세기, 식민지에서 획득한 물건들을 회화로 재현하며 물질적 욕망을 과시한 네덜란드의 정물화('Still Life')를 비튼 것이다.
함씨는 영국과 프랑스의 박물관에서 "와, 많이도 훔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약탈의 증거물들을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또다른 부를 축적하는 거잖아요. 개인들은 작은 잘못에도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데 정작 이렇게 큰 범죄는 묵인되는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문화재 약탈국으로 향하던 시선은 2채널 영상 작업 '사기꾼과 점쟁이'를 보는 순간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한 쪽 화면에서 폭력과 사기, 살인 등 온갖 부조리가 일어나는 동안 다른 쪽 화면의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급기야 한 명씩 자리를 떠나버리고 만다.
문화재 약탈 문제에 무관심한 우리들 역시 약탈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라는 작가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다. 작가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한 약탈의 역사 앞에서도 사람들은 마취제를 맞고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감각하다"고 꼬집는다.
함씨의 작업 방식은 논란을 부를 법하다.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훔친다는 행위 자체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함씨는 "누군가를 불쾌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걱정도 많았고, 훔칠 때마다 매번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면서도 "틀린 걸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예술가가 아닌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그 진정성을 봐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10월 25일까지. 관람료 3,000원. (02)733-8945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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