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조세희로부터 1990년대의 김소진까지, 가난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한국소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에 비하면 부르주아의 사생활은 오랫동안 한국소설의 방외지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 들어 정미경, 서하진, 정이현, 이홍 등 여성 소설가들이 '강남'으로 상징되는 한국사회 최상층부 부르주아 계급의 일상과 내면에 주목함으로써 바야흐로 한국소설에도 '부르주아 서사'가 꽃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학평론가 신수정씨는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에 기고한 '뉴 밀레니엄 시대 부르주아 사생활의 재구성'이라는 글에서 이들 작가들이 그려낸 한국형 부르주아 소설의 특징을 3가지 키워드로 분석하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 취향
21세기 한국의 부르주아 소설이 주목하는 지점은 '돈'이 아닌 '취향'이다. '분위기' 혹은 '때깔'로 표현되는 미묘한 취향의 차이야말로 부르주아 계급과 다른 계급의 경계를 결정하는 요소라는 것.
정미경의 단편 '내 아들의 연인'에서 주인공인 부르주아 가정의 여성은 아들이 데려온 다른 계급의 여자아이를 강남의 백화점에 데려간 뒤 "똑같이 맨 얼굴로 서 있어도 이 동네 사람과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의 피부는 때깔에서 차이가 난다. 그게 걸치고 있는 입성의 차이에서 나오는 느낌만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뼛 속 깊은 데서 나오는 다름"이라고 독백한다.
서하진의 단편 '모두들 어디로 가는 것'은 김밥집 아들에서 의사가 된 남성과, 부르주아 계급 출신 여성 부부가 주인공이다. 남편의 남루함까지 사랑했던 아내지만 '피트니스 센터에서 수영도 하고 사우나도 하고 끝나고 복지리를 먹'는 것이 일상인 아내는 '동네 목욕탕'을 찾는 남편과 취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 반항아 아들
부모에 반항하는 소년의 등장도 이들 소설의 특징이다. 신씨는 "반항이란 안정된 부르주아 가정의 긴장을 전제로 했을 때 그 면모가 뚜렷이 드러난다"고 지적하는데, 따라서 부르주아 계급의 '스위트홈' 이데올로기를 위해 절제와 희생을 감수하려는 아버지와 사적 프라이버시를 유지하려는 아들의 대립은 소설의 주요 갈등 축이 된다.
정이현의 단편 '어금니'의 아버지는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해 착실하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대학입학 선물로 사준 승용차에 원조교제로 사귄 16세의 소녀를 태우고 가다가 소녀가 죽는 사고를 당하자 이를 수습하는데 자신의 모든 인맥을 동원한다.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지만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선택한 아들이 유일한 골치거리인 정미경의 단편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주인공이 터뜨리는 분노는 함축적이다. "세상에 시달리고 인간에 치이다 보면 정말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소리가 절로 나올텐데. 딴데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금실로 짠 카펫을 깔아주었는데 왜? 뭐가 부족해서?"
■ 동물적 캐릭터
성찰적 내면이 결여된 채 오로지 주어진 쾌락에 대한 일차적인 만족만을 중요시하는 동물적 캐릭터도 이들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어금니'에서 자동차에 동승했던 소녀를 죽음으로 내몬 아들은, 병실에서도 동승자의 안위 따위를 궁금해 하기보다는 만화책을 보며 킥킥거리고 있을 뿐이다.
정이현의 단편 '타인의 고독'의 주인공은 결혼정보회사로부터 평점 B+를 받은 이혼남. 와이셔츠는 1주일에 한번 세탁소에 맡기고, 주말에는 절대로 넥타이를 매지 않는 등 일상의 규율을 맹목적으로 고수하지만, 전처가 키우던 강아지를 넘겨받고는 그 '파닥파닥 가쁜 맥박'을 느끼는 동시에 어떻게 아파트 바닥에 내던지면 될까를 고민하는 인물이다.
신수씨는 이들 소설 주인공들에게 결여된 것은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를 통해 주체의 변화를 감행하는 관계맺기의 기술"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부르주아의 일상이야말로 가장 첨예한 자본주의의 권력투쟁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작가들이 한 가닥씩 던져 놓은 이 권력장의 비밀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소설이 이어받고 개간해 나가야 할 소설의 텃밭이 아닐 수 없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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