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으로 점철된 민주화 투쟁, 굴하지 않는 의지, 그리고 이루어낸 평화적 정권교체…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민주화 역사이자 한국의 현대사였다. 집권 후 대통령으로서 이뤄낸 업적들도 신산(辛酸)한 투쟁의 역정보다 덜 극적이지만 그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의미있는 영향을 우리 사회에 미쳤다.
남북화해, 생산적 복지, 인권존중, 지식정보사회에 대비한 IT산업 육성,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 그가 제시하고 실천한 과제들은 냉전의식과 정경유착, 성장의 개념에 빠져있던 한국 사회에 신선한 아젠다이자 패러다임의 변화로 다가왔다.
그런 그의 삶과 역정, 결과들은 국내보다 국제사회에 더 평가를 받았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그와 자리를 함께 하는 게 명예가 될 정도로 한국의 위상과 자존감도 높였다. 김 전 대통령 스스로도 한국인으로는 처음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밝음이 있으면 어두움도 있는 법. 그토록 극복하고 싶었던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고, 정치개혁을 외쳤으면서도 가신과 아들들의 부패를 막지 못했다.
나라의 민주화를 이뤘지만 제왕적 대통령제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해 정당 민주화가 후퇴했다는 평가는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분명 '김대중 평전(評傳)'에 기록돼야 할 과오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룬 크고 굵은 업적들을 상쇄할 수는 없다.
보다 구체적으로 조망해본다면 우선 그가 집권한 사실, 즉 정권교체가 묵직한 정치사적 의미로 다가온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학)는 "평화적 정권교체가 한국 사회의 전 분야에 근본적인 변화를 몰고 왔기 때문에 그 자체로 큰 업적"이라며 "민주화세력의 승리, 호남의 소외감 해소 등으로 국민통합의 측면에서도 큰 기여를 했다"고 평했다.
외환위기 극복도 대표적 치적이다. 나라의 곳간이 빈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 당선 사흘 만에 데이비드 립튼 미국 재무부차관을 만나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금융, 기업, 공공, 노동 등 4대 부문 개혁을 밀어붙였다.
국민들도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이는 등 국가적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모여 2년 만에 IMF 외환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외환위기 극복의 성공적 모델로 한국을 꼽았고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은 한국 정부와 국민의 노력을 '영웅적'이라고 평한 바 있다.
무엇보다 강렬한 상징은 역시 6 15 남북정상회담이다. 그가 2000년 6월15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고 이를 통해 남북화해와 한반도 긴장완화에 이바지했다. 강원택 교수는 "대북포용정책은 기존 패러다임을 넘어선,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대북정책으로 한반도 탈냉전화에 기여했다"며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그 시기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추진했던 금강산 관광사업, 남북당국 간 합의로 이루어진 개성공단 등도 경제적 접근을 통해 상호불신과 적대관계 청산에 기여했다. 그러나 보수세력들은 북한의 핵 개발을 들며 대북 포용정책를 폄하하고 있어 6 15 시대와 이를 역류한 세력에 대한 평가는 훗날의 엄정한 역사에 맡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경제 부문의 성과도 뚜렷하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DJ 정권은 최초의 개혁정권"이라며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소외계층, 서민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주력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그 전까지만 해도 복지문제는 유럽처럼 생산성이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일방적 개념에 머물렀다"며 "복지증진을 경제성장, 경쟁력 향상과 동시에 추구, 과거와 차별화한 정책을 보여줬다"고 짚었다.
그가 쌓은 국제적 명성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고인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만큼 세계적 반열에 선 지도자였고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공적이 컸지만 과오도 있었다.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게 우선 지적될 수 있다. 야당 시절 박정희 정권,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영남 패권주의와 호남차별에 대항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호남 패권주의를 구축, 지역주의를 심화한 측면도 있다.
특히 김영삼, 김종필 두 거물과 함께 한국 정치를 좌우한 이른바 '3김 시대'는 지역주의와 보스중심의 퇴행적 정치문화를 후유증으로 남겼다.
이정희 교수는 "87년 대선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과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것은 군부독재를 연장시켰고 이는 커다란 과오로 지적된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지만 큰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이내영 교수도 "지역주의가 고착하는데 다른 두 김과 결정적 역할을 했고 그 유산은 여전히 한국 정치를 얽매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남북화해정책도 안보상황의 변화로 평가가 유보된 측면이 있다. 이내영 교수는 "보수세력은 일방적 화해협력정책이 북한을 나이브하게 만들었고 지금의 핵개발을 가져왔다는 비판을 한다"며 "이는 향후 북핵 등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요원한 정당 민주화에 대한 일부 책임론도 따른다. 강원택 교수는 "제왕적 카리스마로 민주화 투쟁을 힘있게 이끌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정당 민주주의 실현을 어렵게 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가신정치의 폐해, 집권 후 자식들의 비리연루 등도 위대한 그의 삶에 아픈 상처이자 흠집들로 남아 있다.
박석원 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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