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회사 연구실. 말쑥한 차림의 청년이 부드럽게 거품이 인 카푸치노 위에 크림을 부어가며 그림을 그린다. 크림통을 쥔 손목이 유려하게 흔들리자 커피 위로 하얗게 나뭇잎이 새겨진다.
하지만 이내 청년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커피는 싱크대 하수구로 직행. 그렇게 그리고 쏟아버리길 수 차례 반복한 끝에 한 폭의 수묵화처럼 한 획도 번지지 않은 가지런한 나뭇잎이 완성됐다. 그제야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9월1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리는 제40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출전하는 레스토랑 서비스 부문 국가대표 박청운(22)씨다. "어떻게 하면 심사위원들을 매료시킬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생각해낸 게 라떼 아트예요. 다른 선수들이 커피 서비스만 할 때 라떼 아트까지 보여주면 점수를 더 잘 받을 것 같아 요즘은 이 연습에 집중하고 있죠."
기능올림픽 하면 용접이나 자동차 정비 등 기계 기술을 떠올리지만, 레스토랑 서비스를 비롯해 간호, 요리, 피부미용 같은 미예(美藝) 부문도 전체 44개 종목 중 8종목을 차지한다.
레스토랑 서비스는 캐주얼 다이닝(약식 코스요리), 칵테일 바, 파인 다이닝(정식 코스요리), 연회 서비스 등 4개 과제를 나흘에 걸쳐 테스트하는데, 시험장에서 메뉴에 나눠주면 그에 맞는 서비스를 선보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국은 2001년 서울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 외에는 동메달 하나가 전부고, 2007년엔 선수가 없어 출전조차 못한 취약 종목이다.
"한국에선 레스토랑 서비스가 음식 날라주고 맥주나 따라주는 일인 줄 알지만, 정말 공부할 게 많아요. 냅킨 접는 법부터 커피 만들기, 와인 선별, 푸드 카빙(음식 조각), 프람베(불에 술을 끼얹어 강한 불길로 음식의 비린 맛을 제거하는 조리법), 디본드 서비스(생선 뼈 발라주기)까지 레스토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할 줄 알아야 하거든요."
심사위원들이 테이블에 앉으면 호스트와 게스트, 성별, 나이 등을 파악해 서빙 순서를 정하고, 스타터부터 디저트까지 똑같은 순서로 서비스하는 것은 기본이다.
음식을 서빙할 때 빵과 수프는 러시안 스타일로 손님의 왼쪽에 서서 오른손으로, 음료와 주 요리는 아메리칸 스타일로 오른쪽에 서서 왼손으로 서비스하고, 프랑스 코스 요리는 반조리 상태로 운반 카트인 게리동에 담아 손님 앞에서 완성해 제공한다. 게다가 와인, 위스키 등 각종 주류를 향만 맡고 맞히는 감별 테스트까지 모두 영어로 치러야 한다.
부모가 모두 요리기능장인 박씨는 요리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와 배우의 꿈 사이에서 갈등하며 '삐딱한' 사춘기를 보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영동대 호텔조리외식과에 진학했으나, 요리에는 뜻도 재능도 없었다.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무렵 떠오른 게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가본 2001년 서울 국제기능올림픽대회였어요. 요리 경기를 보러 갔는데 제 눈을 사로잡은 건 그 옆에서 열린 레스토랑 서비스 경기였죠." 아버지는 "레스토랑 서비스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기와 다를 게 없다"며 처음으로 그를 지지해줬다.
하지만 바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연회장에서 아르바이트 해본 경험만 믿고 기출 문제 위주로 외우고 연습해 국내 평가전에 나갔지만 기초가 없다 보니 보기 좋게 낙방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도 레스토랑 문화 자체가 '토종'이 아니라 마땅히 배울 곳도 없었어요. 그래서 짐을 꾸려 뉴질랜드로 갔죠."
웰링턴기술대학에서 6개월간 레스토랑 서비스를 공부한 후 지난해 평가전에서 국가대표 자격을 얻은 그는 이기국 밀레니엄서울힐튼호텔 교육부 원장의 눈에 띄어 올 2~7월 이 호텔에서 집중 훈련을 받았다.
"매일 힐튼호텔의 모든 업장을 다 돌며 연습했어요. 오전 7시부터 뷔페 식당에서 서빙 하고, 점심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게리동 서비스를 하고, 저녁엔 바에 가서 칵테일과 와인 등 주류 서비스 실습을 했죠."
박씨는 VIP 손님에게도 농담을 거는 외국 선수들의 살가운 매너를 좇아가는 게 가장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이 원장은 "청운이가 지독하게 열심히 연습한 데다 외국 유학을 통해 자연스런 매너에 상당히 근접해 있어서 금메달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평가했다.
당장 박씨의 목표는 금메달이지만, 그의 꿈은 훨씬 크다. 전국 대학에 레스토랑 서비스 전공을 만들어 후배들을 양성하는 것과 특급호텔 총지배인이 되는 것.
"국내에선 아직도 레스토랑 서비스를 '웨이터'나 하는 일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외국에선 각광받는 직종이에요.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내 적성에 맞는 분야를 죽도록 파고들어 최고가 된다면 그게 별?아닐까요."
한국은 이번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메카트로닉스, 컴퓨터정보통신, 화훼장식 등 40개 부문에 총 45명의 선수가 출전, 16번째 종합우승에 도전한다. 금메달 수상자에겐 5,000만원의 상금과 금탑산업훈장 수여, 군 면제 등 특전이 주어진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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