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대선이 한창이던 2007년 10월 말 민주당 유시민 의원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높은 지지율을 '구세주 신드롬'으로 해석했다. 뭐 하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참여정부의 진보적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서울시장 시절 가시적 실적을 낸 이 후보가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유씨가 정작 하고 싶었던 것은 다음 말이다. "이 후보의 정책과 공약은 컨셉이 불분명하고 현실성도 없어 집권 1년 반 정도가 지나면 (신드롬의 허상이 드러나) 어려움에 직면하고 좌절할 것이다."
집권 1년반 점검없어 개념 모호
우연찮게도 유씨가 예상한 바로 그 시점에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중도실용주의를 들고 나왔다. 6월 말부터 흘러나온 모호한 얘기의 성격과 내용을 이 대통령의 입으로 공식화ㆍ구체화한 것이다. 요약하면 중도는 국가발전이 국민행복으로 이어지는 위민의 국정철학이고, 실용은 중도를 실현하는 방법론이다. 청와대가 곧 발행할 교본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민생안정과 사회통합을 달성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을 탈이념적이고 실용적으로 찾는 정책노선"으로 정의될 것이라고 한다.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이 대통령은 다양한 인문사회과학적 용어를 동원해 장황한 설명을 덧붙였으나, '이념'이라는 표현은 극도로 자제했다. 이념논란에 휩싸이면 '원칙의 포기'라는 우파의 비판과 '정치쇼'라는 좌파의 공세만 키워주고 상생을 핵심가치로 하는 원래 취지가 흐려진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도 중도실용의 의미는 여전히 붙잡기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집권 1년 반'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중도실용이면 그 앞은 뭐였다는 설명과 함께 양자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궤적을 그려줘야 하는데 그 부분이 빠진 것이다. 좌절 운운했던 유시민씨의 전망은 빗나갔다 해도 정권에 어떤 새 모멘텀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한데도 말이다.
대통령 측근들의 해명은 빈 칸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된다. 강만수 국가경쟁력위원장은 MB노믹스 7대 원칙 중 2번째가 '약자와 경쟁탈락자는 정부가 책임진다'는 것이었다며 "왜 이명박을 뽑았느냐는 질문에서 답을 찾으면 된다"고 말한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은 "MB 정부의 핵심 가치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성공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라며 집권 초기 몇몇 실수로 대통령의 공익적 태도와 관심이 잘못 알려져 안타깝다고 강조한다.
박형준 청와대 홍보기획관은 "다수에게 이익이 되면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중도실용의 요체"라며 서울시장 시절 이 대통령이 만든 버스전용차선을 대표적 정책사례로 꼽는다.
종합하면 대통령의 원래 생각도, 국민들이 원한 것도 일관되게 따뜻한 자유주의와 성숙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중도실용이었는데 이분법적으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우파의 덫과 좌파의 함정에 빠져 그 노선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중도실용의 뜻을 붙잡기 더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같은 합리화와 포장에 있다. 민주화 이후 역대 정권에서 이런 정도의 중도실용은 단골 메뉴였으나 그 끝은 늘 초라했다. 추진주체의 편협함과 성급함, 설익고 모순된 정책의 남발, 과시성 홍보와 소통 부재 등 원인을 추리자면 셀 수도 없다.
사람ㆍ시스템 설계가 성패 좌우
이 정부 역시 대선 때 국민들이 바란 중도실용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 돌연 친서민 운운하며 '중국집 스파게티'처럼 임시변통의 정책을 쏟아내는 것은 그 반증이다. 대표적 시민운동가인 박원순 변호사는 MB정권 출범 때 "실용정부로서 성공할 수 있겠다, 정권을 넘겨준 진보 쪽도 이 기회에 성찰하면 정치적으로 선순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대통령과의 좋은 인연도 적잖은 그는 최근 '배제의 이념이 중도의 실용을 압도하는' 정부에 등을 돌렸다.
이는 역설적으로 사람과 시스템 등 컨텐츠가 중도실용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파 논객 조갑제 씨까지 국체 확립을 전제로 중도실용 정책노선에 공감한다고 하니, 공은 다시 정권에게 넘어갔다. 1년 뒤 중도실용의 모습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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