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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극기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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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극기 훈련

입력
2009.08.17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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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80년대 축구 국가대표 경기 중계방송을 시청하다 보면 자주 듣던 아나운서 멘트가 있다. "선수들, 포기하면 안돼요. 끝까지 정신력으로 버텨야 합니다." 남은 시간과 점수차, 지친 선수들 움직임을 보면 패색이 완연한데도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고집스레 정신력을 강조했다. 신문에도 '게임도 지고 정신력도 졌다'같은 제목이 빠지지 않았다. 과학적인 훈련과 체계적인 지원 부족, 전술ㆍ전략 부재 등 합리적 원인 분석은 뒷전이었다. 저잣거리의 평가도 다르지 않았다. "ΟΟΟ는 머리 모양이 왜 그래? 요즘 선수들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어."

▦정신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유난한 애착은 불굴의 의지로 전쟁의 폐허 위에 경제 기적을 이룬 역사적 경험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 '하면 된다''안되면 되게 하라'식의 군(軍) 문화까지 더해졌다. 급기야 90년대 들어서는 군대에서나 하던 극기 훈련이 대중화했다. 체력과 정신력이 허약해졌다며 청소년들을 극기 캠프에 보냈다. 초ㆍ중ㆍ고생 대상 국토 종단ㆍ횡단 프로그램도 생겨났다. 기업들도 신입 사원들의 도전 정신을 키운다며 연수 프로그램에 극기 훈련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극기 훈련은 무리였다. 곳곳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

▦잠시 주춤하던 극기 훈련은 외환 위기를 맞으면서 부활했다. 박세리의 극기 훈련 경험담은 열풍의 도화선이 됐다. IMF 위기가 닥치자 해병대가 97년 군 최초로 개설한 일반인 대상 '해병대 캠프'는 인기 상한가를 기록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극기 캠프에 들어가 갯벌에 구르고 통나무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정치인, 기업인, 공무원, 운동선수, 수험생들도 앞다퉈 '준 군사훈련'을 받았다. 흙과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이들은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쳤다. 과연 그들은 극기 훈련을 통해 저마다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을까.

▦훈련의 고통을 견뎌낸 성취감에서 현실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군대식 극기 훈련을 정신력 배가의 특효약처럼 여기는 세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스포츠, 종교활동 등 육체와 정신을 강하고 건강하게 해주는 방법은 많다. 서울대 경영대가 최근 학생들을 특전사 훈련 캠프에 입소시켜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고 한다. 며칠 동안 군 훈련을 경험케 한 것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자유로움과 다양함 속에서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야 할 학생들을 군 훈련 캠프에 입소시킨 대학의 고답적이고도 경직된 인식이 놀라울 따름이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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