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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누란' 증발 해버린 '80년대의 시대정신'… 그 씁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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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누란' 증발 해버린 '80년대의 시대정신'… 그 씁쓸함에 대하여

입력
2009.08.16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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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지음/창비 발행ㆍ300 쪽ㆍ1만원

"허무성은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 90년대를 낳았음에도 두 시대는 어느 한 구석을 닮기는 커녕, 완전히 적대적이라고 판단했다. 90년대가 80년대의 자식이었지만, 자식이 곧 아비를 잡아버린 격이었다. 80년대의 시대정신은 메아리도 들려오지 않았다."(83쪽)

"나를 늙은 386으로 불러달라"는 소설가 현기영(68)씨가 후일담소설 <누란> 을 내놓았다.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 이후 그가 10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20대에 80년대를 통과한 세대들이 변화된 현실에 적응해가며 죄책감, 자기연민, 자기합리화라는 고뇌의 줄타기를 하는 이른바 '후일담소설'은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의 한 풍경으로 자리잡았다. 물리적 나이로는 이들보다 20살 가량 연배가 높은, 6ㆍ3세대에 속하는 작가가 2009년에 들려주는 386세대의 후일담은 어떤 모습일까?

소설의 배경은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2002년의 서울이다. 주인공 허무성은 8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정보기관의 모진 고문을 못 견디고 조직의 계보를 밀고한 운동권 출신의 역사교수다. 배신의 대가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다. 정보기관의 후원으로 해외유학까지 마치고 대학교수가 됐지만 그는 마음 한 구석의 부채감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자백으로 징역살이를 했던 동료들은 그들이 싸웠던 독재세력을 계승한 정당의 국회의원으로, 논술학원의 간판 강사로 체제에 순응해간다. 가히 '배신의 계절'이라고 부를 만한 90년대 이후에 역사학자로서 요즘 젊은 세대에게 '80년대의 시대정신'을 설파하는 것은 오로지 허무성 혼자뿐이라는 점은 기묘한 역설이다.

변신한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후일담소설의 익숙한 문법이지만, <누란> 의 차별성은 작가가 저항의 정신을 상실하고 신자유주의적 체제와 소비향락문화에 순치된 현재의 젊은 세대를 향해서도 비판의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점. 당대적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 작가는 다소 과장스러울 정도로 주인공을 무력하게 그려내는 전략을 쓴다.

수업시간에 과거사 청산 문제를 거론하면 "반세기 동안이나 처리 못했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죠.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릴 게 뭡니까? 과거사에 발목 잡히면 전진할 수가 없잖아요"라고 반박하고,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면 "어유, 무슨 얼어죽은 지식인이에요? 그것 따지다가 굶어죽게요"라고 대드는 대학생들. 그들 앞에서 허무성은 "난 이 세상과 주파수가 맞지 않는 고장난 라디오야. 찍찍거리는 라디오"라고 자조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구제불능의 꼴통'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대학생은 언제나 비판하고 저항했어. 비판과 저항이 생명이었어. 너희에겐 그게 없단 말이야!"라며 발악에 가깝게 항변하는 허무성의 모습은 "진짜 변절자는 누구였는가?" "80년대의 아름다운 꿈을 간직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에 대한 작가의 답변으로 읽힌다.

2003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이 작품은 작가가 같은 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에 임명되면서 연재를 중단했다가 퇴임 후 집필을 재개해 완성한 소설. 1980년대 리얼리즘의 유산인 계몽적, 권위적인 목소리는 달콤하고 말랑한 문학에 길들여진 요즘 독자들에게 버겁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가 온몸으로 품어온 꿈틀거리는 비판정신은 오랫동안 그의 소설을 기다려온 독자들에게 소중한 선물이 될 것 같다.

현기영씨는 "80년대의 시대정신은 남은 흔적조차 없고, 대중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르고 앞으로만 가고 있다"며 "생각하고 뒤돌아보는 '깨어있는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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