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를 썼을 때 고양되는 시간, 그것이 없었다면 인생이 얼마나 지루했을까 생각합니다. 시를 놓치지 않고 40년을 보내온 것이 내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나를 성찰하게 해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민족ㆍ민중문학 진영의 과묵한 맏형 이시영(60) 시인. 그의 등단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고형렬, 김정환, 하종오, 김사인씨 등 후배 시인들이 엮은 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 (창비 발행)가 나왔다. 그의 이력으로 가장 먼저 거론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총장 혹은 창작과비평사 주간 같은 직위는 상대적으로 그의 시적 성취를 주목하지 못하게 한 제약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이곳에 묶인 80편의 시는 ‘시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시인 이시영’의 치열한 고뇌를 고스란히 집약하면서 그의 시적 성취에 대한 온당한 평가를 요구한다. 긴>
“정형화된 틀을 깨뜨려가는 것이 예술의 역사이자 시의 역사”라는 그의 말처럼 이씨의 시는 40년 동안 형태적으로 이야기시_단형시_산문시의 형태로 변전했다. 그 변화는 현실에 대한 시적 응전 방식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수성, 저항의식과 떼어놓을 수 없다. 가령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로 시작하는 ‘정님이’(1976) 등 그의 초기 시들은 인물을 소재로 한 이야기시들이다.
“당시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고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회 자체가 서사적 진폭이 컸었죠. 하지만 1960년대말 1970년대 초만해도 현실과 상관없는 ‘난해시를 위한 난해시’가 주류였습니다. 젊은 시인으로서는 급박한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의 시적 변화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의 시대’였던 1980년대가 지나자 이씨의 시는 일본의 하이쿠를 연상시키는 단형시로 변모한다. 시가 변혁의 무기로 강조되면서 예술적 긴장감을 상실한 당시의 시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이 밤 깊은 산 어느 골짜구니에선 어둑한 곰이 앞발을 공손히 모두고 앉아 제 새끼의 어리고 부산스런 등을 이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겠다’(‘애련’ㆍ1997) 같은 짧은 서정시편들은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다. 반대로 2000년대 이후 그는 다시 산문시로 돌아갔다. 환경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생태시ㆍ자연시 등 현실을 탈각한 시들이 갑자기 홍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리얼리스트이자 리얼리즘 문학의 병참기지였던 창작과비평사에서 무려 23년 2개월을 일해온 만큼 ‘현실에 대한 시적 응전’을 보는 이씨의 시각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시인이 아니다’라고 네루다가 말했던가요. 가치있는 현실을 노래한다고 가치있는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노래하되 독특한 미학이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는 몇 년 전부터 논란이 되고 있는 ‘미래파’ 시인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제가 처음에 ‘정님이’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갔을 때 이어령씨 같은 분은 ‘이게 산문이지 시냐’고 면박을 줄 정도였습니다. 시인이란 당대의 노래, 그들의 노래를 그들의 감각으로 불러야만 합니다. 리얼리즘도 위기라고 한탄만 하지 말고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미학으로 자기갱생을 꾀해야 합니다.”
1980년 편집장으로 입사한 이래 부사장, 상임고문 등을 거쳐 2003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현재도 ‘창비시선’의 기획위원으로 시인이자 편집자로서의 경륜을 발휘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단국대 초빙교수로 시창작 이론을 강의하고 있는 그는 올 가을 문을 여는 연희창작촌에 들어가 시작에 몰두할 계획. “젊은 사람들처럼 감각적인 시를 쓰지는 못하겠지만 좀더 깊어진 세계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영혼, 사랑, 죽음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시를 써볼 생각입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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