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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열전! 추억 속으로] 씨름 전성기 이끈 천하장사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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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열전! 추억 속으로] 씨름 전성기 이끈 천하장사 이준희

입력
2009.08.13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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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질 몸매와 서글서글한 눈빛, 구수하고 정다운 말투까지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52)는 세월이 흘렀지만 명성 그대로였다.

민속씨름의 1세대로서 이만기 인제대 교수와 인기를 양분했던 이준희는 희로애락 표현 없이 그저 묵묵히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모래판의 신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생애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했을 때도 그는 특별한 세리머니 없이 미소만 살짝 지었던 '포커페이스'였다.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7회의 장사타이틀을 차지한 이준희. '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은퇴하기 전 1~13회 천하장사대회에서 모두 8강에 오르는 성실함을 보여줬다. 그는 건강한 이미지를 살려 '인삼홍보'에 뛰어들어 새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 천하장사에서 '인삼 얼굴마담'으로

이준희는 1987년 10월 제13회 천하장사로 등극한 뒤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정상에서 물러났기에 팬들의 뇌리 속에는 '영원한 천하장사'로 남아 있다. 이후 씨름계에 몸 담으며 씨름 발전에 이바지해왔던 그는 1년 전부터 '인삼의 도시' 금산에서 인삼사업에 뛰어들었다.

공식직함은 대동고려삼 부사장. 그는 안내와 관리 등 홍보 활동에 힘을 쏟는 '얼굴마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성격이 내성적이라 여전히 사람 앞에 나서는 게 익숙지 않다"며 "인삼은 약 종류라 식품법 등 숙지해야 할 게 너무 많고 복잡하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씨름만 알고 살았던 그에게 인삼사업은 너무나 생소했다. 10평 남짓한 모래판에서 2,000여평의 인삼공장이 그의 새로운 삶의 터가 됐다. 지도자생활을 거치며 다소 외향적으로 변한 그는 '분위기몰이'에 한 몫을 톡톡히 한다.

그는 "손님들이 오면 인삼 효능 등을 설명하며 분위기를 잡아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며 "9월 시작하는 인삼축제를 위해 인삼공부에 매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서울 첫 상경 '장충체육관 쇼크'

씨름판을 호령했던 이준희에게도 지우고 싶은 햇병아리 때가 있었다. 중1 때 이미 70㎏가 넘는 '비만아'였던 그는 형의 권유로 살을 빼기 위해 샅바를 잡았다.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경북 의성중으로 전학 후 첫 전국대회에 출전했다.

'시골소년'에겐 '씨름판의 성지'인 서울 장충체육관은 너무나 큰 무대. 체육관을 빼곡히 메운 팬들의 함성소리는 그를 움츠려 들게 했다.

중2 때 단체전 경기에 참가했던 그는 "관중이 너무 많아서 머리 속이 멍했다. 당황한 나머지 상대를 들고 그대로 모래판 밖으로 나가버려서 패하고 말았다"며 쓰디 쓴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준희의 패배로 결국 의성중도 3-4로 패해 우승트로피를 놓치고 말았다. '장충체육관 쇼크'를 경험한 그는 "엄했던 코치 선생님도 저의 플레이에 너무 황당했는지 처벌하지 않고 그냥 웃고 넘기더라"고 덧붙였다.

■ 씨름 밖에 모르는 '숙맥'

씨름에 몸 담은 지 어느덧 40년이 된 그에게 외도의 시간도 있었다. 이준희는 "고교 1년 때 씨름 선수로서 대학을 졸업해도 비전이 없을 것 같아서 세계대회와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유도부로부터 유혹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당시 코치 선생님의 회유로 모래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준희는 "씨름으로 천하장사에도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기러기아빠'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가족 곁에서 안정된 생활을 꾸릴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교수직뿐 아니라 여러 단체에서 제의가 들어왔던 것. 하지만 이준희는 "석사, 박사 등의 학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씨름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만기, 손상주, 이봉걸 등 왕년의 스타들과 씨름 발전을 위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이준희는 "씨름이 서야 이준희라는 이름도 서는 것이다.

지금은 씨름이 침체 돼있지만 10년 뒤에는 다시 부흥할 것이라 믿는다"며 "동호회 활성화 등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시스템과 환경 구축으로 후배들이 행복하게 씨름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청사진을 제시했다.

김두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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