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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클린턴의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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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클린턴의 '5분'

입력
2009.08.13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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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평양에 가서 북한이 억류 중이던 두 미국인 기자를 데리고 귀국한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북미관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 여러 평가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환영 분위기 속에서 "테러 국가의 위신을 세워줬다"는 비판도 있고, '철저한 개인적 방북'이라는 미 정부와 클린턴의 선 긋기에도 불구하고 북미관계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이냐는 탐색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인들의 반응은 좀 색다르다. 방북 자체에 대한 평가 보다는 클린턴이 북한과 미국에서 보여 준 절제 있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런 감탄 뒤에는 으레 우리의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에 대한 한탄이 뒤따른다.

'큰 인물'의 절제와 품위

5일 새벽 버뱅크의 밥호프 공항에 특별기가 착륙하고 141일만에 풀려난 두 여기자가 눈물로 가족들과 포옹하는 동안 클린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족 상봉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5분쯤 비행기 안에 있다가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풀려난 기자들과 그들의 소속사인 커런트TV 엘 고어 회장이 인사말을 하는 동안 말 한마디 없이 지켜보기만 했고 시선을 끄는 어떤 제스처도 없었다. 밥호프 공항의 주인공은 두 기자들이었다.

클린턴의 도착 성명은 뉴욕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북한 감옥에서 오랜 시련을 겪었던 두 여기자가 풀려나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그는 도착 다음날인 6일 클린턴 재단의 에이즈 관련 행사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으나 여전히 말을 아꼈다. "더 이상 말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미국과 북한과 우방들에 무심코 영향을 줄 수 있는 말을 내가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정책 결정자가 아니며 정부에 방북 내용을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까지 클린턴의 이미지는 달변의 머리 좋은 야심가에 통제불능의 바람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양으로 달려가 두 여기자를 구출해 온 그는 전직 대통령의 관록과 품위, 절제와 겸양을 지닌 '큰 인물'로 다가왔다. 그는 침묵으로 과거의 달변보다 더 많은 점수를 땄다. LA타임스는 "인격이란 최종도착지가 중요한 것이지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클린턴이 세월이 흐르면서 조용한 우아함을 갖기 시작했다"는 독자 기고를 실었다.

이번에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 지도자들의 '화해'다. 2000년 대선에서 패배한 앨 고어 전 부통령은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이 패배의 원인이었다"고 말한 것이 클린턴과의 불화로 이어졌고,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는 힐러리 아닌 오바마를 지지했지만, 자신이 설립한 커런트TV 소속 기자들의 석방을 위해 클린턴의 방북을 요청했고 클린턴은 기꺼이 수락했다. 고어는 밥호프 공항에서 "솜씨 있게 힘든 임무를 완수한 클린턴과 그의 팀에 감사한다"고 인사했고, 두 사람은 뜨겁게 포옹했다.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힐러리와 경쟁하며 거친 공격으로 상처를 주고 받았던 오바마 대통령은 힐러리를 국무장관에 기용하면서 클린턴 전 대통령까지 '덤'으로 받은 셈이다. 오바마는 "클린턴 대통령의 비범한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한심한 우리 지도자들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존 볼튼 전 유엔 대사는 "테러 국가의 위신을 세워주었다. 테러리스트와 협상한 꼴이다."라고 비판했지만, 클린턴의 방북은 모두가 우정을 회복하는 또 하나의 선물을 미국에 안겨주었다. 김정일의 위신은 국내용으로 효과가 있을 뿐 대외적으로는 초라함을 더욱 강조했다.

미국인들에겐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클린턴의 말과 행동이 이처럼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한심하기 때문이다. 절제 겸양 품위 등의 미덕은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지도자의 덕목으로 강조되는 것들인데, 어쩌다 우리 지도자들은 이 지경이 되었을까. '클린턴의 5분'을 한 때의 화제로 넘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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