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시작인 입추(立秋)에서 더위의 끝물인 말복(末伏)까지는 계절 변화의 핵심이다. 어제 그제 그끄저께 7일이 입추였고, 내일 모레 글피 13일이 말복이니 오늘은 그 한복판이다. 입추는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15일씩 과학적으로 나눈 24절기(節期) 중 하나이고, 말복은 풍습과 세태를 반영한 이른바 속절(俗節)이다. 지구 북반구에서 태양이 가장 많이 비치는 날을 24절기의 기준인 하지(夏至)로 삼았는데, 이후 땅이 뜨거워지는 시간을 감안해 세 번째 경일(庚日)이 초복, 네 번째가 중복이다. 말복은 입추 이후 첫 번째 경일이다.
▦옛 어른들이 하지 이후 두 차례 '경일'과, 입추 이후 최초의 경일을 초ㆍ중ㆍ말 삼복으로 규정한 지혜가 놀랍다. 경일은 하늘을 10간(天干)으로 나눠 매일 이름을 붙인 7번째로, 5행(行)의 의미로는 가을 전반부다. 갑을(甲乙ㆍ봄ㆍ나무ㆍ木), 병정(丙丁ㆍ여름ㆍ화ㆍ火), 무기(戊己ㆍ중간ㆍ흙ㆍ土), 경신(庚辛ㆍ가을ㆍ쇠ㆍ金), 임계(壬癸ㆍ겨울ㆍ물ㆍ水)가 그것이다. 삼복은 원래 '지칠 듯 더운 날'이면서 '가을을 생각하며 더위를 이기는 날'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셈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이 날만은 가을이고 싶은 바람이 숨어 있다.
▦초ㆍ중복과 말복은 의미가 나뉜다. 하지(6월 21일쯤) 때 낮이 가장 길지만 땅은 7월말~8월초에 가장 뜨겁다. 이 기간 중 '가을날(경일)'이 열흘 간격의 초ㆍ중복이다. 하지만 입추 이후 첫 경일인 말복은 꼭 중복의 열흘 뒤가 될 수만은 없다. 확률적으로 13~14일 후가 많고, 20일까지 벌어질 수도 있다. 지난달 24일이 중복(초복은 14일)이었으니 올해가 정확히 그렇다. 이 경우 '열흘 만의 복날'을 건너 뛰었다고 '월복(越伏)'이라 불렀다. 월복한 말복도 복날이긴 마찬가지이니, 올해엔 초ㆍ중ㆍ말 삼복더위만 해도 30일이 되었던 셈이다.
▦입추가 지나면 선선해진다지만 아무래도 말복이 지나야 무더위가 물러간다. 복날의 '복(伏)'자는 '엎드리다, 항복하다'라는 뜻인데, 왜 개(dog)와 얽히게 됐는지 모르겠다. 미국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날짜를 정해 놓고 'Hot summer day'라는 원래 명칭 대신 'Dog day'로 부르며 치킨 가게를 찾아 다닌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가을의 의미인 '경일'이 얼굴을 내밀었다가 혼이 나서 굴복(屈伏)한 날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유난히 길었던 삼복더위가 나흘밖에 남지 않은 걸 반기며, '입추 지난 첫 번째 경일'이라는 옛 지혜를 되새긴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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