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 사람들의 단골 화제는 중의원 총선이다. 이달 30일로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은 데다 민주당의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아 관심이 유별날 만도 하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이번 총선에서 투표하겠다는 사람이 90%를 넘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평균 60%대이던 역대 투표율을 훌쩍 뛰어넘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민주당이 불 당긴 공약 경쟁
이런 선거 참여 바람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 각 정당의 매니페스토(선거공약) 경쟁이다. 지난 달 말 집권 자민당이 공약을 발표하면서 주요 정당들의 공약이 모두 공개되자 일본 신문들은 연일 각 당, 특히 자민당과 민주당의 공약 비교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신문이며 TV에서 공약 비교하는 모습이 한국과 크게 다를 건 없다. 하지만 이번 일본 총선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건 그런 공약을 유권자들이 너도나도 입에 올리며 어느 정당의 무슨 공약은 무엇이 좋니, 나쁘니 하며 토론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도 그 동안 보기 드물었던 풍경이라고 한다.
일본이 선거에 정당 매니페스토를 정식으로 도입한 건 2003년이다. 갈수록 떨어지는 투표율을 만회하기 위해 그 해 중의원 선거에서 공명당이 처음 제시한 뒤 이어 다른 정당도 너도나도 공약을 발표했다. 도입 당시는 각 당의 공약이 선거 분위기를 주도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이어 2005년에도 중의원 선거가 있었지만 이때는 총선이 고이즈미(小泉) 정부가 내세운 '우정(郵政)민영화' 찬반 투표로 변질돼 버렸다.
이번 총선을 '매니페스토 선거'로 바꾸는 데 큰 몫을 한 건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생활과 밀접한 공약을 필요 예산과 재원 확보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명기해 매니페스토로 제시했다. 예를 들어 저출산 대책으로 중학생까지 자녀 1인당 매달 2만6,000엔씩 연간 31만2,000엔(400만원)의 육아지원금을 약속했다. 얼른 봐서는 선거 앞두고 표 얻자고 남발하는 선심성 공약 같기도 하다. 하지만 민주당은 필요 예산이 연간 5조3,000억엔이며, 구체적으로 예산 낭비를 줄이고 세제 개정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공약이 구체적이라고 유권자들이 모두 그럴 듯 하다고 여기는 건 물론 아니다. "재원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는 자민당처럼 과연 그만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현금 지급보다 보육원, 유치원을 늘리는 게 급선무라고 이론을 제기하는 유권자도 있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의 공약을 보며 많은 유권자들이 공약이란 추상적인 미사여구의 나열이라고만 여기던 고정관념을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멀게만 느껴지던 신문의 공약 비교 기사에 눈길이 가고, 나아가 각 당의 공약에 대해 스스로 의견을 갖게 되면 자연스레 선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마련이다.
매니페스토는 소중한 경험
일본 역시 '매니페스토 선거'의 경험이 일천하다보니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없지 않다. 민주당은 발표 이후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일부 공약을 수정했다. 자민당은 10년간 경제성장 목표를 집권 4년의 주요 공약으로 제시하는 엉뚱한 모습도 보였다.
8월 총선은 일본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더위로 선거운동 자체가 힘들뿐 아니라 휴가철이어서 투표율이 낮아질 수 있어 역대 모든 정권이 피했기 때문이다. 몸은 힘들지만 이 불볕 더위 아래서 일본 유권자들은 어쩌면 정권 교체보다 더 소중할 '매니페스토 선거'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범수 도쿄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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