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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이 여름의 피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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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이 여름의 피서법

입력
2009.08.10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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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휴가, 피서, 행락 같은 말은 모르고 사신다. 텔레비전으로 우주 구경도 할 수 있는 세상에 왜 사서 고생이냐는 분이다. 딸은 아버지의 유전자를 갖기 마련이라 나 역시 웬만해선 집을 떠나지 않는다. 부채를 부치면서, ‘얼음 빙’ 한 글자로 절절 끓는 온돌방을 얼려버린 사명대사를 떠올린다. 그래도 더우면 동네 산책을 나선다.

호젓한 소나무 길을 슬금슬금 걸어 내려가 칠엽수(七葉樹)와 느티나무가 어우러진 공원으로 들어선다. 그늘진 벤치에서 늙은 연인들이 삶은 달걀을 까먹고 낮술에 취한 노숙자가 코를 곤다. 건너편 풀밭에선 노인들이 구경꾼이 더 많은 화투판을 벌이고 있다.

왁자한 웃음소리가 멀어질 즈음, 서대문형무소의 낡은 벽돌담이 나타난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구색만 남은 담벼락이지만 녹이 슨 듯 군데군데 붉은 빛을 띤 담장 풍경은 과거의 악명을 떠올리게 한다. 1908년 문을 연 뒤 여러 차례 증축을 거듭하며 독립과 민주화에 앞장선 이들을 잡아가둔 형무소 앞에서 체험학습을 온 아이들이 깔깔대고 있다. 차가운 감옥의 냉기, 벽에 걸린 일본도의 선명한 핏자국, 발밑이 쑥 꺼지는 교수대를 겪은 뒤에는 잠시 잊힐 웃음이다.

높은 담장이 끝나고 초록색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산책의 마지막 코스다. 아무리 더운 날도 이 근처만 가면 몸이 식는다.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형무소의 을씨년스런 풍경 때문이다. 사각의 붉은 벽돌담 앞에 ‘통곡의 나무’로 불리는 미루나무가 홀로 우뚝하다. 그 아래, 숱한 사형수들이 마지막 숨을 토했던 교수대가 있다. 오라에 묶여 남의 손에 죽는 죽음이다. 죽을죄를 지은 자에게도 참혹한 죽음인데 하물며 억울한 죄를 쓰고 죽은 사람임에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1959년 7월 31일 오전 10시 50분 한 사내가 미루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수번 2310번. 대법원의 재심청구가 기각되자마자 바로 다음날 아침 사형 집행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불시에 닥친 죽음에도 2310번은 담담했다. 그는 입회한 목사에게 누가복음 23장 22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자,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11시 3분, 시간이 멈췄다. 일제 감옥에서 손톱을 뽑히고 손가락마저 잃었지만 목숨은 잃지 않았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간첩이 되어 죽었다. 죽기 3년 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평화통일을 내걸고 216만 여 표를 얻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 평화통일에 유죄를 선고했다. 9개월 뒤 그를 죽인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고, 죄목이었던 평화통일은 이 나라의 국시(國是)가 되었다.

“승자가 패자에게 죽음을 당하는 건 흔한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유언했던 그 남자, 조봉암이 죽어서야 나왔던 형무소를 바라본다. 형무소는 박물관으로 바뀔 수 있으나 한번 죽은 죽음은 다시 살릴 수가 없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무겁다. 그 무거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 무거움을 너무 빨리 잊은 세상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더위를 피해 달아날 것도 없이 여기 이 땅이 온통 추운데, 피서도 소용없는 여름이 길기도 길다.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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