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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에세이] 거대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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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에세이] 거대한 희망

입력
2009.08.10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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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프리카 케냐인이고 지금도 그의 친할머니가 케냐에 생존해 있는 사람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주저함 없이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의 주인공 버락 오바마는 지난 미국 대통령선거 직전에 책을 한 권 냈다. <희망의 담대함> 이라는 범상치 않은 제목의 이 책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현실정치에 무관심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그의 열광적 지지자로 만드는 데 한 몫 했다.

개개인의 의사가 현실정치에 반영되지 않는 데서 오는 무력감과 냉소적인 태도가 오늘날의 정치시스템이 당면한 큰 문제라면, 이러한 냉소주의 극복의 가능성을 보여준 오바마는 이미 그의 담대한 꿈의 절반을 이룬 게 아닐까?

상황과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 이러한 거대한 꿈을 가졌던 사람 중에 알란 튜링(1912~1954)이라는 영국 사람이 있었다. 20세기 초반을 살다간 불세출의 천재 과학자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의 유보트 관련 암호통신 내용을 수학적으로 해독하여, 대서양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견인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수학적 엄밀함에 정통했던 튜링은 어린 시절부터 생명현상이나 뇌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대담한 꿈은 인간의 사고과정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기계가 그 과정을 모방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가는 것이었다. 불과 20대의 청년이던 1930년대에 이미 이론적으로 컴퓨터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는데, 당시는 아직 하드웨어적인 컴퓨터가 출현하기도 전이었다.

약관의 나이이던 그는 튜링 머신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인간의 사고 영역에 속하는 문제들을 기계가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이제는 대학교에서 전산학을 배우는 학생은 모두 튜링 머신이라는 개념을 배워야 하고, 현대 문명에 끼친 영향만으로 하면 튜링은 지성사에 길이 남을 사람이다.

튜링은 청년기에는 이론 컴퓨터의 개념을 만들어 내는 데 몰두했지만, 이후에는 생명 현상의 수학적 설명에 천착했다. 이러한 전환의 동기가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사고의 과정에 대한 관심과 생명 현상에 대한 궁금증을 동일한 범주로 본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겠다.

그는 동물의 표피에 있는 무늬의 다양성에도 관심을 가져서, 이를 수학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즉 점무늬를 가진 치타, 띠무늬를 가진 얼룩말, 무늬가 없는 코끼리같이 얼핏 혼란스러워 보이는 다양성을 단일한 이론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윈의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이 거대원칙의 역할을 할 순 있겠지만, 튜링은 피부색을 결정하는 화학물질과 억제하는 물질이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서 이 두 물질의 반응-확산 방정식을 만들어 다양한 무늬를 설명하려 했다.

튜링의 이러한 발상은 옥스퍼드의 수학자 제임스 머레이에 의해 구체화되어, 반응-확산 방정식의 해가 태아의 크기에 따라 점무늬나 띠무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생명현상에 대한 수학적인 통찰과 접근이 확대된 오늘날, 생물 수학은 이제 현대수학의 한 분야로 여겨진다.

거대한 꿈을 가졌던 이 천재는 안타깝게도 42세의 나이에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났다.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한 혼돈과 세상의 핍박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더 오래 살아 그의 대담한 꿈을 펼쳤더라면 20세기 문명의 모양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너무 과한 상상일까.

박형주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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