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다녀갔다. 역사적 사건이다. 이번 방북은 전광석화와 같이 이뤄졌다. 24시간도 안 되는 체류다. 그러나 성과는 컸다. 5일 아침 전세기 입구에서 여기자 두 명을 맞이하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모습은 방북 이벤트의 하이라이트였다. 세계 주요 언론에 클로즈업된 이 장면은 극적인 효과를 내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오바마 대통령의 합작품이었다. 김 위원장과 클린턴 전 대통령의 회담 역시 극적이었다. 북미 현안을 '대화로 풀자'는 견해 일치는 대반전의 시작이 될 것이다.
주연은 김정일과 오바마
클린턴 방북 이벤트의 주연은 김정일 위원장이었다. 그는 세계의 이목을 다 끌어다 놓고 자신의 건강과 건재를 과시하는 확실한 '선물'을 챙겼다. 클린턴 방북을 기획한 북한 측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김 위원장이 세계 언론에 최대한 건강하게 비치는 것이었다. 회담과 만찬이 이어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석 달 또는 1년 이내 사망설 등이 나돌던 건강에 대한 불신은 상당 기간 잠복할 것이다. 김 위원장의 건강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북한 붕괴론도 당분간 설 자리를 찾기 어렵게 됐다.
북미 직접대화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김 위원장에게는 큰 선물이다. 미국 정부는 이번 이벤트와 북미 직접대화 문제는 별개라고 강조하지만, 강한 부정이 오히려 긍정으로 읽혀진다. 6자회담은 절대 불가하고, 북미 직접대화만 하겠다는 것이 그 동안 북한의 입장이었다. 물론 6자회담 불가라는 북한의 의도대로 미국이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6자회담이 재개되더라도 북미 직접대화가 핵심적인 동력이 될 가능성이 보다 높아지고 있다.
유엔 안보리결의 1874호로 대표되는 국제사회의 대북압박 공조를 지연 또는 약화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도 김 위원장에게는 선물이다. 특별사면을 통해 두 여기자를 풀어 준 것은 김 위원장과 북한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가외의 선물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도 주연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는 사전 물밑접촉에 따라 마련된 이번 이벤트의 조연이었다. 김 위원장과 오바마 대통령의 메신저로서의 그의 역할을 폄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남편이자, 북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전직 미국 대통령이라 해도 그는 '전직'일 뿐이다.
또 다른 주연은 오바마 대통령이다. 김 위원장보다는 못하지만, 그 역시 선물 보따리를 챙겼다. 거의 다섯 달 만이지만, 억류 여기자 문제는 해결되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국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는 미국인들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에게 억류 여기자들을 성공적으로 구해낸 것은 가뭄 속 단비와 같다. 북한의 핵개발 시계 작동을 일단 정지시킬 수 있게 된 점도 성과다. 북미 대화든 6자회담이든, 대화로의 대세 전환 속에서 북한의 행동을 정지시킬 발판은 마련했다고 본다.
구경꾼에 머물러선 안돼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이벤트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낄 수 있는 자리는 현실적으로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방관자로 머무를 수는 없다. 북미관계의 진전에 병행하는 남북관계 개선 노력이 요구된다.
이 대통령이 8ㆍ15 경축사에서 북미관계의 변화 흐름을 반영, 유연한 대북접근 의지를 표명하기를 기대한다. 이를테면 이명박판 '대북 포괄적 패키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개성공단, 억류 근로자 유씨, 나포 어선 문제 등 남북관계를 긴장시킨 현안을 한꺼번에 해결하고 식량과 비료 지원, 금강산 관광, 인도적 대북사업 등을 포괄적으로 패키지 딜 하는 것이다. 명분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남북관계와 한반도 관리자는 누가 뭐래도 이명박 대통령이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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