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며 개국했으나 나라의 틀을 제대로 갖추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흘러야 했다. 경복궁이 태조 즉위 3년 만인 1394년에야 착공됐고, 이듬해 완공됐지만 1398년 정종의 즉위와 동시에 고려 왕조의 도읍지인 개성으로 천도를 했다. 1400년에 즉위한 3대 태종은 한양으로 환도했고, 2년 뒤 경회루를 지어 경복궁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했다. 그러나 새로 건설된 도읍을 두르는 돌 성벽이 완성돼 한양이 온전한 도성이 된 것은 세종 즉위 4년째인 1422년, 조선의 개국 30년 만의 일이다.
■세종은 국방과 내치, 문화 창달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대왕'이라는 칭송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조선의 대표 임금이었다.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중심점은 시대정신에 따라 달랐지만, 어느 분야에서든 으뜸자리는 늘 그의 차지였다. 대한민국 수도 한가운데 길이 '세종로'가 되고, 거기에 만들어진 광화문 광장에 그의 동상이 자리잡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대학이 그의 이름을 교명으로 삼고, 5만원 권 발행 전까지 오랫동안 최고액권이던 1만원권에 그의 초상이 들어갔다. '세종'이라는 이름과 이미지는 만사형통의 상징과 다름없었다.
■그런 '세종'의 상서로운 기운도 행정복합도시에서만은 무력하다. 지난달 처리될 예정이던 '세종시 특별법'은 아직 상임위에 묶여 있고, 6월 말까지 자족기능 보완책과 이전기관 변경을 고시하겠다던 정부도 입을 다물고 있다. 2개 면의 편입이 예정된 충북 청원군이 뒤늦게 반대를 외치고, 민주당과 충북도가 청원군의 주장을 지원하고 나선 것이 직접적 계기다. 2개 면이 편입되면 청원군이 단일 국회의원 선거구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계산, '세종시 특별법'이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의 제휴 고리라는 민주당의 경계심 등 정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혔다.
■언뜻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과거의 입장을 맞바꾼 듯하지만, 각각 당내 이견조차 해소하지 못했으니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이런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되다가는 막대한 혈세를 퍼부어 유령도시를 만들게 된다. 애초에 '수도 이전' 구상이 정치적 이해고려에서 비롯했다는 태생적 한계가 드러난 셈이지만 지금은 그런 논의조차 무용하다. 이제 와서 백지화할 수도 없고, 그럴 자신도 없는 이상 '행복도시' 건설과 관공서 이전을 강행하는 외에는 달리 복잡한 정치적 이해를 조정할 방법도 없다. 세종대왕에게 더는 부끄럽지 않을 방안이기도 하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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