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형 유통업체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사석에서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친 기업 정부라고 불리는데, 이미지만 그렇지 실제 참여정부 당시와 비교를 해봤을 때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도리어 그는 제조업체가 아닌 유통업체 입장에서 보면, 참여정부 때보다 현 정부에서 기업 환경이 더 나빠진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유통업체의 출점을 제한한 경우는 없었다"는 이유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친 서민' 기치를 내건 이후 사회 곳곳에서 갈등과 충돌이 확산되고 있다. 스스로 'MB노믹스'의 수혜 계층이라고 믿었던 대기업과 고소득층은 급작스러운 정책 변화에 불만이 극에 달해 있고, 그렇다고 내용 면에서 서민ㆍ중산층이나 중소기업들을 만족시키기엔 현저히 부족한 모습이다. 원칙과 기준이 불분명하다 보니, 어느 쪽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셈이다.
확산되는 골목상권 충돌
최근 대형 유통업체들의 기업형 슈퍼마켓(SSM) 출점 중단은 겉으로 보기엔 골리앗(유통업체)이 다윗(중소상인)의 반발에 밀린 모양새지만, 그 이면엔 '친서민' 행보를 내세운 정부의 암묵적 지지가 있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SSM 공방이 한창이던 6월 하순 친 서민 행보의 첫 방문지로 서울 이문동 골목상가를 찾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결론이었다는 것. 유통업계는 "규제의 최소화라는 현 정부의 기조와는 정면 배치되는 것 아니냐"며 잔뜩 볼 멘 소리다.
그렇다고 정부가 앞으로도 중소상인들의 손을 계속 들어줄지는 미지수다. 신규 출점 반대 뿐 아니라 기존 영업점의 품목 및 영업시간 제한 등으로 요구가 확대되고 있는 데다, 대기업과 중소상인들의 대립이 서점 미용실 꽃집 등 다른 업종으로까지 전면 확산될 조짐.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는 "기업활동 자유나 소비자 이익 증진의 측면에서 본다면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을 계속 막을 수 없을 것이고, 또 그래서도 곤란하다"며 "대신 현실적으로 중소상인들이 입게 될 피해를 보상해주는 원칙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급조된 부자 증세
급조된 서민정책으로 일관성이 훼손되는 사례도 잇따른다. 대표적인 것이 기업 설비투자액의 10%를 세액에서 제해주는 임시투자세액공제(임투공제) 폐지 방침이다. 참여정부가 임기 말에 폐지하려 하자, 당시 현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정권 말기에 기업들에게 대못을 박으려 한다"며 강력 반발하면서 사수했던 제도. 더구나 3개월 전에는 설비투자액이 직전 3년간 연평균 투자액을 넘을 때 초과분에 대해 10%를 추가 공제하기로 확대해놓고, 이제 와서 아예 폐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아무리 증세가 필요한 상황이라지만 하루 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지난해와 올 상반기 잇단 '부자 감세'에 나라 재정에 경고등이 켜졌고, 이를 메우기 위해 비과세ㆍ감면 제도 정비에 나섰다가 '서민 증세' 반발에 부딪치자 부랴부랴 세수감소분(올해 1조8,000억원)이 큰 임투공제를 희생양으로 삼은 셈이다.
포퓰리즘 논란
무조건 '서민 배려'를 정책 1순위로 놓다 보니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 논란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생계형 범죄자 150만명 8ㆍ15 특별사면이다. 대상자들이야 당연히 환호하겠지만, "과연 음주운전자까지 사면하는 것이 서민 배려냐"는 지적이 들끓는다. 특히나 현 정부 들어서 이번이 벌써 3번째 특별사면. '엄정한 법 질서 확립'이라는 정부의 기치를 스스로 저버린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최근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도 마찬가지다. 서민들의 학자금 고민을 덜어준다는 취지는 좋다지만, 향후 5년간 7조~8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원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학자금 대출의 건전성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뚜렷한 대책이 뒷받침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연말께는 영리 의료법인 도입 여부를 둘러싸고 시끄러울 전망이다. 기업형 의료법인 도입은 서비스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추진되어온 핵심정책이지만, '결국 이런 병원은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 아니냐'는 반대정서에 직면해 있다. 때문에 정부도 주춤거리고 있고, 어떤 결론이 내려지든 '부자 대 서민' 구도의 공방이 불가피해 보인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친 서민 정책이 구호에 그치거나 부작용만 양산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책들이 정합성을 갖고 상충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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